강청희 기흥구보건소장

혹자는 대한의사협회 상근부회장으로 있다가 지역 보건소장으로 자리와 역할이 바뀌니 입장도 변했을 것이란 추측과 함께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곤 한다. 하지만, 작년 이맘 때 제2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비례대표에 도전해 실패한 이후 언론 지면에 토로했던 “의료계를 위한 백의종군의 심정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과 각오는 그동안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수차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퇴색됨 없이 초심 그대로다.

사실 용인시 인구 100만명 중 40만명을 책임지는 보건행정의 단위기관을 맡아 운영하다 보니 필자가 소속된 지역사회와 지역보건 그리고 보건행정 체계에 대한 관심이 의료직역의 현안문제 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옴을 부정할 수 없다. 되레 그동안 우리가 친숙하지 않았던 공공의료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멀리했던 감염관리체계 등 국민건강에 필수적 국가 현안들을 전체 의료계 차원에서 서로 공유하고 고민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됐으면 한다.

현재 전국에는 254개의 보건소가 있으며, 이 가운데 40.9%에 해당하는 103개소에 의사가 보건소장으로 임용돼 지역보건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지역보건법에 따르면 시·군·구 별로 1개씩 보건소를 설치하고 시행령 제13조에 의거해 의사면허가 있는 사람 중에서 보건소장을 임용하도록 돼 있다. 임용이 어려운 경우에는 보건 등의 직렬 공무원이 5년 이상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보건소장 임용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조례를 통해 자체적으로 보건소 조직에 대한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대도시를 제외한 중소도시의 경우, 업무를 총괄하는 보건소를 지정 운영할 수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다른 보건소장의 직급을 낮추는 ‘직급 하향 조정 또는 그동안 보장된 보건소장 직급 평가 절하’조치 등을 내리고 있다. 한마디로 인사권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편법을 통해 현재의 보편적 보건소장 직급을 하향 조정해 의사가 아닌, 비전문가를 선거용 또는 정략적 차원으로 기용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다.

얼마 전 천안시는 2개구의 보건소 중 개방형임기제 의사보건소장의 재계약을 거부 하면서 직급을 5급으로 하향 조정하는 조례를 추진해 충청남도의사회와 대한공공의학회의 강력한 반발과 반대에 부딪혔었다. 이 부분은 지자체장의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라 결론이 어떻게 날지 귀추가 주목되지만 이면에 숨은 문제를 들춰보면 개방형임기제의 폐단을 비롯해 전문직 집단의 폐쇄성에 대한 몰이해와 갈등, 그리고 행정위주의 시정운영에 따른 조직정비 및 이해관계가 서로 맞물려 있다. 모두 풀기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현재 보건소의 기능과 주요 업무 영역은 모두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의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반면, 행정체계는 행정자치부의 지침에 따르도록 하고 있다. 결국 지자체의 인사체계와 행정체계의 지배를 받는 이중적이면서 기형적 시스템이라 갈등요인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처럼 복지부와 행자부 두 영역 간에 뚜렷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유리한 이해관계만을 추구하여 책임과 역할만을 부여하고 따지고 든다면 마치 무인도에 표류하는 난파선보다 더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난 2015년 메르스 사태의 국가적 혼란을 겪으면서,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인한 문제점들을 뼈저리게 느꼈다. 전문가의 중요성이 부각됐던 사건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사태를 보면 행정체계는 전문가의 참여를 배제하는 쪽으로 방향성을 잡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닐 것으로 믿지만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너무나 자명하다. 더욱이 인공지능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이 세계 인류의 가장 센 화두가 되고 담론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성을 무시하고 전문가를 배제한다면 이 또한 선심성 또는 정략적 행정만을 위한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필자는 의협 상근부회장으로 재직 시, 보건부 독립을 주장했고 보건소의 보건부 편재 그리고 의사 보건소장의 임용원칙 준수를 요구한 바 있다. 물론 의사 중에 보건소장이 되기를 희망하거나 또는 합당한 행정경험을 갖추고 공공의료의 비전을 가진 전문가들로 전국 보건소를 다 채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노력은 기울여야 하며 전문성을 배양할 수 있는 국가적 토대와 시스템만큼은 훼손됨 없이 견고하게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말단의 행정조직부터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긍정적이고 순기능적 변화의 물결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생명과도 같은 변화를 위한 노력에 함께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한다.

각 지역의사회 별로 인력을 모으고 중앙회의 공중보건 교육과정에 동참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우리가 아무 일도 안하는데, 대신해서 해 주는 곳은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득, 작고하신 어머니께서 개원을 접고 의협 상근직 임원으로 옮길 때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진료하는 의사가 의사지. 의사가 환자를 볼 때 의사인 거야.”

하지만 의사를 위한 의사, 지역사회를 위한 의사, 그리고 국민을 위한 의사가 다르지 않다. 비록 진료실은 떠났지만 진정한 대의를 위한 길을 걷고 있으며 후배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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