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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아우슈비츠-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는 없다

기사승인 2017.09.23  07: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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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재소자들이 사용하던 일용품(좌) 한끼 식사.(중) 피골이 상접한 재소자의 모습.(우)

월리엄 이안 밀러는 ‘포로수용소에서 줄을 선택할 때 올바른 위치에 서는 것이자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구사일생’이라 했다.(1) 하지만 줄을 제대로 섰다 해도 겨우 3개월 정도를 더 사는 것에 불과했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일단 가스실을 피한 사람들은 인근 슐레지엔의 광산이나 제철소, 군수품공장 혹은 농장 등에서 중노동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오시비엥침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선별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평균생존기간이 불과 3개월이었다고 하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톱밥이 섞인 빵 한 덩이에 썩어가는 배춧잎을 넣고 끓인 스프 한 그릇 그리고 버터로 구성된 식사는 하루 1,500칼로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4호 막사부터 7호 막사까지 수용소와 관련 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5호 막사의 어느 방에는 재소자들이 신고 온 신발들을 쌓아놓았다. 소련군이 수용소에 진주하였을 때, 창고에는 무려 4만3천 켤레의 구두가 보관되어 있었다. 또 다른 방에는 재소자들이 가져온 여행용 가죽가방이 쌓여있다. 가방에는 잃어버린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통유리를 통하여 들여다 볼 수 있는 4호 막사의 5번방은 사람들의 머리털다발이 쌓여있는데 14만 명분에 달한다고 했다. 이 방은 특히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이렇게 획득한 머리털로 카펫을 만들었다고 한다. 역시 소련군이 점령했을 당시 무려 7톤에 달하는 머리털다발이 발견되었다.(2)

닳고 달아 속살이 드러난 막사 계단(좌) 위안소였던 24호 막사(우)

막사의 층계는 턱이 닳고 달아서 대리석의 속살이 드러나 있다. 위층에는 재소자들이 가져온 식기류, 안경, 신발 등이 방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어느 방에는 그들이 가지고 온 가방 등 짐이 쌓여 있다. 수용소를 박물관으로 조성하면서 가져온 것들이다. 나치는 재소자들이 가져온 물품들을 재분류하여 귀중품을 찾아내고 재활용하였다. 재소자들이 들고 온 물품들을 재분류하는 곳에는 주로 여성들이 근무하는 선망의 근무처였으나 이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24호 막사는 아예 재소자들 가운데 뽑힌 여성들로 운영되던 위안소였다.

아우슈비츠에서 삶을 마친 사람들.(좌) 대량학살에 사용된 사이클론B(우)

복도에는 이곳에서 스러져간 것으로 확인된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어느 방에는 가스실의 모형과 희생자를 처형할 때 사용했던 사이클론 B를 전시하고 있다. 사이클론 B는 시안화수소(청산가스)를 안정제 등과 함께 규조토에 흡수시킨 것으로 살충제로 사용되던 것인데, 사람까지 잡았던 것이다. 깡통에 쓰여 있는 Giftgas라는 단어가 희화적이다. 영어로 읽으면 선물가스일 터이나 독일어로는 독가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처형한 것은 주로 제2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박물관을 만들면서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모아서 전시하려다 보니 이곳에도 모형을 만들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전쟁 막바지에 나치 친위대가 관련 자료를 없앴기 때문이다. 오시비엥침에 진주한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수용소를 접수한 직후 400만명이 학살당했다고 발표했지만, 이 수치는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본다. 1995년 뉴스위크지는 ‘과장되고 꾸며낸 이야기가 많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110만에서 150만 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2005년에는 유대인 희생자가 1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비유대인으로는 폴란드인이 7만명, 집시가 2만1천명, 소련군 포로 1만5천명 등이다.(3)

사이클론B가스로 재소자를 처형하는 방법은 회스중령이 소장으로 있는 아우슈비츠1 수용소에서 시작되었다. 11번 막사의 지하에서 행한 사이클론B가스를 이용한 첫 번째 처형실험을 참관한 회스중령은 “나는 총살에 관여할 때 군중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참혹함과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나 국가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한 인질처형이나 집단적 총살에는 진절머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희생자들도 최후의 순간까지 친절하게 돌보아줄 수도 있겠고 해서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다.”라고 고백록에 적었다. 사이클론B를 이용한 가스처형은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일명 빨간집과 하얀집이라고 부르는 대규모 시설을 완성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가스실은 다목적인 이유로 마치 샤워실처럼 꾸몄다. 희생자들에게 지금부터 샤워하러 간다고 쉽게 속일 수 있었고, 희생자들이 스스로 옷을 벗게 함으로서 사후에 옷을 벗기는 별도의 품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당연이 희생자들이 개켜놓은 옷은 새로 들어온 재소자들에게 지급되었다.(4)

이 장소에서 본 가장 마음이 아팠던 전시물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했다는 내용이다. 아우슈비츠에 온 어린이들은 입소 즉시 처형시키고 인체실험 대상으로 선별된 어린이는 살려두었다. 인체실험은 주로 제1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맹겔레는 쌍둥이실험에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쌍둥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을 했다. ‘유전적으로 병들고 가치 없는 사람들의 재생산 제한을 목표로 한 사회적 위생실천’을 주장한 독일 우생학의 거장 페르슈어박사의 가르침을 받은 멩겔레는 쌍둥이의 비밀을 밝혀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데 기여하려고 했다. 그는 집시, 쌍둥이, 난쟁이 등등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했고, 나중에는 어린이들을 해부해서 장기를 분석도 했지만 별 성과는 없었었다. 이렇듯 끔찍한 짓을 저지른 맹겔레는 종전 후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잘 지내다가 전범으로 체포될 우려가 높아지자 남미로 달아나 그곳에서 죽었다. 의사의 본분을 잊고 아우슈비츠에서 인체실험을 주도하는 죽음의 의사로 활동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미셸 시메스의 <나쁜 의사들>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들의 연구가 인류의 건강을 위하여 공헌할 무엇을 찾아냈는지 몰라도 그들은 ‘의학계의 수치’이다.

콜베신부를 기리는 동판

막사를 지나다보면 11호 막사의 벽에 동판이 붙어 있다. 폴란드인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신부를 기념하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람이 발생하면 수용소 당국은 제소자 한 사람을 아사방(餓死房)에 가두었다. 언젠가 아사방에 갇히게 된 어느 폴란드군 중위가 가족, 특히 딸을 보고 싶다고 버티는 걸 보고 콜베신부는 자진해서 아사방에 들어갔다고 한다. 콜베신부는 같이 갇혀있는 수용자들을 격려하면서 견디도록 힘을 주었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온 수용소사람들이 신부를 위해 기도하는 등 수용소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결국 3주 후 수용소당국은 콜베신부를 독살하고 말았다.

13번 막사부터 21번 막사까지는 유대인 이외에 나치에 희생된 다양한 국적의 희생자들을 위한 전시공간이다. 특히 13번 막사는 집시라고 알려진 유럽계 롬족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전시관은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물론 나치의 만행에 유대인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노력을 유대계가 가장 활발하게 벌어온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대한 나치의 범죄는 그냥 묻혀 면죄부를 받고 말았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취사장 건물 밖에 세워진 교수형틀(좌상),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이중 철조망. 330V의 고압전류가 흘렀다.(좌하), 감시초소(우)

수용소의 막사에 전시되어 있는 끔찍한 만행의 증거들을 보고나서 소각로를 보기 위하여 이동했다. 이동 중에 취사장 건물 밖에 축구 골대를 두 개 이어놓은 듯한 교수형틀이라고 했다. 아침 점호를 취하는 열병장(Appellplatz)으로 들어가는 통로 옆에 서 있다. 그 입구에 감시초소(Old sentry box)가 서 있다. 교수형틀에 매달린 재소자를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감시하기 위해서였을까? 참 가지가지 했구나 싶다.(5)

소각로는 수용소 밖에 있었다. 수용소 밖과의 경계선에는 330V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를 이중으로 쳐놓았다. 막사 곳곳에 있는 감시탑과 철조망의 높이로 보아 탈주가 쉽지 않았겠다. 오히려 철조망은 모진 삶을 끝내려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이곳에 갇힌 그들은 무슨 희망이 있어 죽어가는 순간까지 버텼을까? 어쩌면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힘을 내지 않으면 너는 힘을 잃고 만다.(잠언 24:10)”라는 성경말씀에서 힘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수용소 밖 외딴곳에 있는 소각로(좌), 소각로의 대기실 벽에 새겨진 손톱자국(중), 2기의 소각로(우)

전기 철조망을 벗어나 소각로건물에 들어서면 검댕으로 그을린 벽에 손톱으로 긁은 자국을 재현해 놓았다. 아마도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벽을 긁었던 것을 재현해 놓은 듯하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 가운데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시체처리반 밖에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아우슈비츠 1 수용소에 있는 소각로에는 2기의 소각로가 설치되어 있다. 재소자를 대량으로 학살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소각처리하는 작업은 주로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살해한 사람을 태우는 소각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하다. 일행들 모두 굳은 표정이고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옮긴다. 소각로를 끝으로 참관을 마치고 아우슈비츠를 떠났다. 마음은 무겁지만 그래도 찾아오기를 참 잘했다.

참고자료:

(1) 윌리엄 이안 밀러 지음. 잃어 가는 것들에 대하여 312쪽, 레디셋고, 2013년

(2) Auschwitz Museum Exhibits.

(3) Wikipedeia.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4) 나무위키. 아우슈비츠.

(5) Old Sentry Box & Kitchen at Auschwitz I.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yang412@hira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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