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욱의 블루하우스

대한민국은 위원회 공화국이다. 수많은 위원회가 있다. 법적으로 위원회는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의결기구, 심의기구, 자문기구.

의결기구인 위원회는 가장 강력한 위원회다. 관할 범위의 안건에 대하여 위원회가 ‘의결’해야 정책을 집행할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법상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는 의결기구다.

박형욱 단국의대 교수

한편 심의기구인 위원회는 ‘심의’만 하면 된다. 보건의료기본법상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는 심의기구다. 그러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는 2010년 3월에 국무총리 산하에서 보건복지부 산하로 이관된 후 2016년 9월까지 구성되지 않았다. 이처럼 심의위원회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기구에 불과하다. 보건의료분야 대부분의 위원회는 심의위원회에 불과하다.

더 존재감이 없는 것이 자문기구인 위원회다. 헌법 제90조 제1항은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이 ‘자문’을 구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그런데 만일 대통령이 국가원로자문회의에 자문을 구한 뒤 모든 것은 국가원로자문회의에서 결정했다는 식으로 말해도 될까? 그건 무책임한 변명이다. 권한이 있는 대통령 자신이 책임지고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문은 결정을 하는데 참고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법 제66조 제1항은 심사평가원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심사평가원에 진료심사평가위원회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문상으로는 그 성격이 애매하다.

그러나 다른 위원회와 달리 진료심사위원회는 ‘심의’가 아닌 ‘심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진료심사위원회를 ‘심사기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사위원이 ‘심사’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평원은 내부적으로 진료심사위원회를 ‘자문기구’로 격하시키고 심사위원은 ‘자문위원’으로 격하시켜 운용해 왔다.

그래서 심사위원회와 심사위원은 심평원의 정식 결재라인에서 아예 배제되어 있다. 그래서 정식 결재라인에 있는 심사직원들은 필요하면 심사위원회나 심사위원에게 ‘자문’을 구한다. 물론 하기 싫으면 안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심사기준이나 심사결과에 의학적 의문이 제기되면 심사직원들은 ‘모두 의사인 상근심사위원이 결정한 것’이라는 식으로 답변을 해 왔다.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으로 격하시켜 놓았으면서 이럴 때는 마치 결정권한이 있는 위원회나 위원인 것처럼 책임을 돌린 것이다.

물론, 심사직원들이 자문을 구한 안건에 대해 심사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은 거의 존중된다. 그렇다고 해서 심평원이 내부적으로 규정한 자문위원회라는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심사위원회를 존중한다면 정식 결재라인에서 결재권한이 있는 위원회로 운영해야 한다. 그러나 심평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체 심사 물량 중에 심사위원이 관여하는 것은 정말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거의 대부분의 심사는 심사위원의 관여 없이 심사가 진행된다. 물론 심사위원의 수가 제한되어 있어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해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전체 심사 물량을 심사위원회의 관할 하에 두고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심사위원의 감독 하에 심사직원이 간략심사를 하는 것과 심사위원이 직접 심사를 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심평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필자는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똑같이 ‘심사위원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나 산재재심사위원회와 진료심사위위원회는 운영되는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산재재심사위원회는 관할 범위 내 모든 안건에 대하여 정확하게 의결권을 가지고 의결을 한다. 이 위원회를 정식 결재라인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심평원 심사위원회를 자문기구로, 심사위원을 자문위원으로 운용한다면 ‘심사위원 실명제’가 아니라 ‘심사자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정식 결재라인에서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이 심사결정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문위원에 불과한 심사위원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민원이 제기되면 심사 결정을 한 심사자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 심사자가 심사기준과 심사결과의 의학적 논거에 대해 민원인에게 직접 설명해 주어야 한다. 때로 토론도 하고 설득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모습이 책임 있는 행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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