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2016 민속공예장인축제를 알리는 현수막. 축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줄지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로 가기 위하여 버스를 타러가는 길에 축제마당을 만났다. 헤비에즈도스와브(Hviezdoslav)광장에서 2016년 민속공예장인축제(Dni majstrov ÚĽUV 2016)가 열리고 있었다. 민속예술제작센터(ÚĽUV Ústredím ľudovej umeleckej výroby)가 주최하는 이 행사에는 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선발된 100명 이상의 도자기공, 대장장이, 직조공, 보석상, 목공예가 등 전통 수공예품의 장인들이 모여 제작과정을 직접 보여주는 행사이다. 대장장이는 불을 피우고 쇠를 달구어 망치질을 하고 있고, 직조공은 베틀에 실을 걸어 무언가를 짜고 있으며, 도자기공은 물레를 돌려 도자기를 만들고 유약을 바른다. 종장인은 종을 매달아 연주를 한다.

불을 피우고 무언가를 망치로 두들기는 대장장이로부터(좌) 종을 걸어놓고 연주를 하는 종장인(중), 베틀에 앉아 무언가를 짜고 있는 직조장인들도 있다(우)

우리도 용인민속촌에 가면 옛날에 쓰던 물건들을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저 잠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런데 이곳에서 민속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이나 구경을 하러 몰려든 슬로바키아 사람들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2016년 행사가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한 공예품이 유행으로 돌아온다(V dlhej ľudskej epizóde,remeslo je opäť v móde.)’를 선전표어로 내세운 것이 십분 이해되는 대목이다.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가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행사는 민속공예품 이외에도 민속과 관련된 다양한 것들이 구시가지의 중심에서 열리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앞서 본 인형극이나 손으로 돌리는 음악통도 이 행사의 일부였나 보다.(1)

헤비에즈도스와브의 동상(좌) 안델센의 동상(우)

행사의 중심인 헤비에즈도스와브(Hviezdoslav)광장에는 헤비에즈도스와브(Hviezdoslav)의 동상이 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몰랐던 그의 본명은 파벨 오르슈작(Pavol Országh)이며 ‘별을 축하함’ 또는 ‘별의 슬라브’라는 의미의 슬라브 이름 헤비에즈도스와브는 1875년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슬로바키아 문학과 문화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하나인 그는 시인이자, 극작가, 변호사이자 체코슬로바키아 혁명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1849년 지금의 슬로바키아 돌니 쿠빈(Dolný Kubín)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헝가리의 미슈코프에 있는 문법학교를 다녔다. 그 무렵 헝가리 시인들의 시에 매혹되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슬로바키아로 돌아와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헝가리어와 독일어로 시를 썼지만, 결국은 슬로바키아어의 음조를 맞춘 시를 써내 슬로바키아의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게 되었다.(2) 아참 이 광장에는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델센의 동상도 있다. 안델센이 브라티슬라바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기 보다는 아마도 구도심 곳곳에 숨겨놓은 다양한 동상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11시경 브라티슬라바를 떠나 비엔나로 향했다. 1시반경 비엔나에 도착했다. 이날 우리는 아침나절에만 세 나라를 여행한 셈이다. 헝가리, 슬로바키아, 그리고 오스트리아 세 나라의 수도가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공화국은 중앙유럽 알프스 산맥에 걸쳐있는 내륙국가이다. 면적은 83,855 ㎢으로 북쪽으로는 독일과 체코, 동쪽으로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서쪽으로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등 여러 나라와 국경을 나누고 있다. 서쪽으로는 알프스 산맥이 북쪽으로는 카르파치아 산맥이 펼쳐지고 있어 동쪽에 있는 32%의 영토만이 해발 500m이하의 낮은 지대이다. 인구는 877만명(2017년 1월 1일 기준)인데, 84.7 %는 오스트리아인이며, 15.3 %는 외국인이다. 외국인들 가운데 2014년 기준으로 5만 명 이상인 인구집단은 독일이 21만, 터키가 16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15만5천, 세르비아가 13만2천, 루마니아가 7만9천, 폴란드가 6만6천명이다. 일인당 GDP는 2016년 기준 44,561달러로 세계에서 14번째로 높다.

오스트리아(Austria)라는 이름은 ‘동쪽 영역’을 의미하는 독일어 외스테라이히(Österreich)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12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외스테라이히라는 지명은 오스타리치(Ostarrîchi)와 같은 어원을 가지는데, 이는 996년에 기록된 오스타리치문서(Ostarrîchi document)에 처음 등장한다. 976년 당시 바이에른 현에 편성된 바바리아의 동쪽은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다뉴브강 유역이다.(3)

오스트리아는 유럽대륙의 중앙부로 선사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을 것이다. 기원전 8세기 무렵에는 켈트인이 정착하여 할슈타트문화을 일구었고, 기원전 2세기에는 노리쿰(Noricum) 왕국을 세웠다. 기원 전후에 로마인들이 도착하여 노리쿰을 제압하여 속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1세기 무렵 게르만족이 도래하면서 일진일퇴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5세기 초 훈족이 침입하여 일시 점령하였다가 아틸라 사후 물러남에 따라 게르만부족의 재편성이 일어났고, 이어서 슬라브족과 함께 아바르족이 진출하면서 로마인들은 철수하게 되었다.

5세기 후반 왕국을 이룬 프랑크족은 8세기 말 카롤링거왕조의 카롤루스 대제가 이 지역을 바이에른에 귀속시켰으며, 동쪽으로 나아가 아바르족을 물리치고 오스트마르크를 설치했다. 하지만 9세기 말 마자르인이 서진을 시작하여 10세기에는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카롤링거왕조를 계승한 동프랑크 왕국의 작센왕조의 오토 1세가 955년 마자르인을 격파하고 오스트마르크를 재건하였고, 962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이 땅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오토2세 시절에는 오스트마르크를 바이에른으로부터 분리하여 바벤베르크가문에 하사하였다.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1156년에는 세습 공작령으로 승격되었고, 1192년에는 슈타이어마르크 공작령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지만, 1246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프리드리히2세가 전사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를 맞았다. 알면 좋지만 별 재미가 없는 역사 이야기는 잠시 접어둔다.

쇤부른 궁전의 정면

점심시간이 막 지날 무렵 비엔나의 쇤부른궁전에 도착을 했으니 일단 밥을 먹어야 했다. 궁전 부근에 있는 식당에서 오스트리아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스트리아식이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아니었고, 4명씩 앉은 식탁에 소시지, 햄, 감자, 닭고기, 돼지고기 등으로 된 4인분의 요리가 하나의 그릇에 담겨 나왔다. 그리고 각자 받은 개인접시에 알아서 나누어 먹는 것이다. 함께 여행한지가 꽤 된 탓인지 싸우지 않고 눈치껏 나누어 먹었다. 식사 후 쇤부른궁전 구경에 나섰다. 파리의 베르사이유궁전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쇤부른궁전의 외관은 좌우대칭을 특징으로 하는 바로크양식이면서 내부는 화려한 비대칭의 로코코양식을 혼합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쇤부른궁전(Schloss Schönbrunn)은 비엔나에 있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여름 별궁이다. 왕실에서 쓰는 물을 공급하던 우물이 있어서, ‘아름다운 우물’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온 이름이다. 메이드링(Meidling)과 히칭(Hietzing) 사이의 언덕 아래 있는 이 장소는 빈 강(Wien river)이 범람하면 잠기던 곳이다. 1569년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2세 황제가 이곳을 사들였다. 이전 주인이 1548년에 세운 카터부르그(Katterburg)라는 이름의 맨션이 있었지만, 황제는 이곳에 울타리를 치고 황실 사냥터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꿩, 오리, 사슴, 멧돼지는 물론 칠면조와 공작 같이 이국적인 새들도 있었고, 물고기를 풀어놓은 연못도 만들었다.

페르디난트2세 황제가 죽은 뒤 사냥을 좋아하던 엘레오노라 곤자가(Eleonora Gonzaga)황후가 이 곳을 자주 이용했는데, 1638년부터 1643년까지 카터부르그맨션에 궁전을 지었다. 이곳을 결혼선물로 받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는 1740년부터 1750년 사이 쇤부른에 궁전을 지었다. 그리고 프란츠1세 황제가 궁전의 외관을 신고전주의양식으로 보완하였다.

멀리 언덕 위에 글로리에테가 보이고 그 사이에 프랑스식 대정원이 펼쳐진다(좌) 바다의 신 넵튠을 형상화한 분수대(중), 대정원의 오른편에 있는 미로의 정원 입구(우)

대지 50만평에 달하는 쇤부른 궁전은 1441개의 방을 가진 궁궐과 정원으로 구성된다. 일자형으로 앉힌 건물 뒷편으로 커다란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정원은 60m 높이의 언덕 위에 세운 글로리에테(Gloriette)를 축으로 펼쳐진다. 합스브르크왕가의 영광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글로리에테 구조는 레오폴드1세의 명에 따라 이곳에 궁전을 지을 계획이었던 피셔 폰 에르라흐(Fischer von Erlach)의 설계에 따른 것이다.

언덕 아래에는 바다의 신을 형상화한 넵튠 분수(Neptune fountain)가 있다. 넵튠 분수의 왼편에는 로마유적의 형상을 세웠다. 원래는 카르타고의 유적으로 알려졌던 로마유적은 요한 페르디난드 헤첸도르프 폰 호헨베르그(Johann Ferdinand Hetzendorf von Hohenberg)의 설계로 1778년 건립되었다. 옆벽이 있는 거대한 아치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웅덩이로 고대의 건축물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때 위대했던 힘의 쇠퇴와 영웅적인 과거 유적의 보존을 상징한다. 그 옆에 있는 오벨리스크 분수(Obelisk Fountain)와 함께 쇤부른의 안정성과 영속성의 상징으로 완성하고자 했다. 넵튠분수에서 궁전까지의 프랑스식 대정원(Great Parterre)의 양쪽에는 신과 미덕을 상징하는 32개의 조각품을 나누어 세웠다.

대정원의 오른쪽에 볼거리가 많은데, 글로리에테의 오른쪽에는 쇤부른 동물원(Tiergarten Schönbrunn)이 있다. 세계적으로 자이언트 판다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물원이다. 물론 쇤부른의 초기부터 작은 동물원이 있었지만, 1752년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1세의 명에 따라 확장하여 설치되었고, 1779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조세프 2세 황제는 동물원에 수용할 동물을 잡아오기 위하여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 탐험대를 보내기도 했다. 넵튠분수의 오른편 아래로 더 내려오념 대정원을 감싸 안은 나무벽 뒤에 미로의 정원이 숨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래로는 영국식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4)

쇤부른궁전의 대연회실 (Wikipedia에서 인용함)

쇤부른 궁전의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천정화를 보느라 목이 휠 정도였던 커다란 연회실이 기억에 남았고, 합스부르크왕가에서 사용하던 침실, 서재 등에 다양한 집기들과 초상화들을 구경했던 것 같다. 쇤부른 궁전의 내부의 모습은 구글 사이트에서 조금 맛볼 수 있다.(5)

참고자료:

(1) Ústredím ľudovej umeleckej výroby. Dni majstrov ÚĽUV 2016.

(2) Wikipedia. Pavol Országh Hviezdoslav.

(3) Wikipedia. Austria.

(4) Wikipedia. Schönbrunn Palace.

(5) Google Arts & Culture. Schönbrunn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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