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양지병원 영상의학과 이상환 과장

영상 판독을 영어로 ‘reading’이라고 한다. 환자의 영상 검사 사진을 해석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아프게 되었는지 직접 보지도 않은 환자의 사진을 보고 판독하면서 가끔 생각하곤 한다. ‘차트에 쓰여 있는 몇 줄을 보고 아픈 사람에 대해 판단을 하는 게 옳은 진료를 하는 것일까?‘. ’나는 사진의 패턴을 기계적으로 읽고 있는 것일까? 환자를 생각하고 읽어야 하는데...‘.

영상의학과 의사는 질병이 있는지 없는지 누군가의 낮과 밤을 구분해주는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니치 천문대처럼 표준시를 제시해 주면 좋으련만 판독을 하면서 느끼는 소회는 해와 달을 보고 어림잡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환자의 시간은 밤을 향해 달려가는데, 나는 때로는 미로에 갇혀 있을 때가 있다. 치료 방침 결정에 중요한 변수가 되는 판독을 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질 때이다. 판독에 따라 중요 장기를 절제하거나 수술 범위가 달라지는 환자를 생각하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번뇌에 빠지지 않는 쉬운 길도 있다. 교과서적으로 적립된 확률적인 판독을 하면 된다. 그러나 뭔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면 그냥 넘어가질 못하는 고질병이 있다.

이러한 병을 나에게 안겨준 한 어린 아이의 어머니가 있다. 쉬운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던 나에게 사진이 아닌 환자를 읽으라고 말해준 어머니.

5년 전 전공의 시절 생후 4개월 된 민성이를 어린이병원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부산에 있는 큰 병원에서 우측 콩팥에 ‘윌름 종양’이라는 악성종양을 진단받고 콩팥을 떼어내야 한다고 했던 아이. 민성이 어머니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다시 검사받겠다고 해서 어린이병원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당시 민성이의 CT, MRI 사진을 교수님과 함께 보았지만 교수님은 별다른 이견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콩팥 종양의 석회화 부분이 마음에 걸리면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기분이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수술을 앞둔 민성이를 병원 복도에서 우연히 지나가다 보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과 대비된 어머니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차라리 내 콩팥을 떼어가오.’ 어머니의 마음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아이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 마음이. 민성이 어머니의 마음은 일에 쫓겨서 뭔가 석연찮은 마음을 그냥 넘겼던 나에게 뭉클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민성이 어머니를 보고 나니 갑자기 어릴 적 급성간염으로 한 달 동안 병원생활을 했던 기억이 났다. 평소 갖고 싶었던 것들을 다 사주고 어른들이 관심 많이 가져줘서 혼자 신이 났었던 기억이 있다. 민성이도 지금 그런 기분일까? 그런데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던 것 같다. 그 때 어머니 심정이 이랬을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민성이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온 것인데, 너무 빨리 포기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뭔가 알 수 없었던 기분을 그냥 지나친 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선생님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는지. 나 또한 정성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부끄럽지만 그제야 들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그 길로 교수님과 다시 상의를 하러 가서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았다. 찾다보니 전 세계에서 15개의 증례보고만 있는 아주 희귀한 어린아이의 콩팥 양성 종양인 ‘신장 골화성 섬유종‘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께서는 교과서에 제대로 정리된 영상 소견이 없어서 진단을 하기 어렵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조금 더 연구를 해 보겠다고 했다. 양성종양이면 콩팥 내부의 종양만 적출하면 되기 때문에 콩팥을 보존해서 아이가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성이가 정상인으로 살아가길 내심 기대하며 퇴근하고 집에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망스러운 것은 교수님 말씀대로 전 세계적으로 워낙 드문 질환이다 보니 확실한 영상소견에 대해 정리해 놓은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출력을 해서 15개 증례보고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았다. 천천히 보다 보니 ‘신장 골화성 섬유종‘은 ’윌름 종양‘과는 콩팥 내부에서의 위치와 종양 내부의 석회화에서 패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교과서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소견이었기 때문에 이걸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고심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가만히 있어서 민성이가 콩팥을 적출해도 누구하나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반대로 혹시 내가 틀리면 그 비난은 내가 감당해야 했다. 아이에 대한 가여운 마음이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 건 아닌지도 곱씹어 보았다.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민성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밤늦게까지 고민한 결과 양성종양인 ‘신장 골화성 섬유종’의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날 교수님을 찾아가서 연구한 바로는 민성이는 양성 종양인 ‘신장 골화성 섬유종‘의 가능성이 높을 것 같고, 판독을 바꾸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기존의 지식으로나 확률적으로나 악성종양의 가능성이 높지만 교수님은 자세히 듣고 열린 마음으로 전공의의 말을 들어주셨다.

“양성종양인 것에 제 오른 손목을 걸겠습니다”라고 웃으며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해”라고 말씀하셨다. 영화 ‘타짜’의 주인공도 아니면서 무슨 소리를 이렇게 호기롭게 하는 건지. 치료 방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판독이라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건 아닌지 많이 초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성이가 앞으로 정상인으로 살아가면서 가끔 나를 기억해 준다면 기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민성이는 콩팥을 떼어내지 않고 종양만 적출을 하게 되었다. 몇 일 뒤에 판독실에 들어왔는데 동료 전공의가 민성이가 양성 종양인 ‘신장 골화성 섬유종‘으로 최종 병리 결과가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그 얘기를 들은 교수님이 “도끼 준비해 놨었는데 쓸데가 없네”라며 껄껄 웃으셨다. 이후로 연구한 소견을 정리해서 ’신장 골화성 섬유종‘의 영상소견에 대한 논문을 세계 최초로 썼고,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교과서에 인용되는 논문이 되었다. 민성이와 같은 아이들이 이제는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큰 수확이었다.

가끔 판독을 하면서 민성이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픈 사람과 그 가족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더욱 더 치열하게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은 힘든 길을 가야 하지만 그걸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만한 보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환자의 마음을 ‘reading' 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기대하며 오늘도 누군가의 낮과 밤을 함께하고 있다.

환자 대 의사의 관계 회복을 주제로 한 수필전에 응모하게 된 부분은 여러가지 척박한 의료현실에서 환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가지로 미흡한 전공의 시절 김해에서 부산의 큰 병원을 거쳐서 서울에 있는 모병원에 오게 된 모자를 보고 느꼈던 안타까움으로 전공의가 보통은 하지 않는 행동을 했던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시작됐던 일인데 하나하나 파헤치다 보니까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을 발견하게 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전공의 시절 이 병이 있는 환아를 한명 더 보았었는데 그 때는 수술 전 바로 정확한 진단이 가능했습니다. 세계에서 15명 밖에 없는 질환이라기 보다는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존에는 대부분 콩팥을 제거하고 나서 양성질환이 나오니까 보고를 안한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더 연구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건 부끄럽게도 평소 접하지 않았던 환자를 접하고 나서였습니다.

환자는 의사에게 자신의 절박한 마음이나 속내를 다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병원에 올 때는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옵니다.

반면에 의사들은 매우 바쁜 일과속에서 잠깐잠깐 시간을 할애하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타협하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이런 부분이 환자들과 의사들 사이에 괴리감이 생기는 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매번 좋은 결과가 있을 수도 없고 매번 가장 정확한 진료를 할 수도 없습니다.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노력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하는 게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부족한 저에게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하고, 가족같이 지내는 H+양지병원 선생님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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