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사회, 인권센터(가칭) 설립 등 성폭력 피해 방지에 적극

법조계 만큼 수직적이고 경직됐으며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의료계다. 그렇기에 서지현 검사가 과거 성추행 사건을 폭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그 누구보다 공감한 사람들이 여의사들이다.

서 검사로 인해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우리 사회에 숨어 있던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료계에는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여의사들이 꾸준히 있었다. 의료계에서 공론화된 성폭력 사건 대부분이 피해자들이 숨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로 알려졌다. 그들만의 미투 운동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의료계도 성폭력 사건이 불거지면 가해자보다 피해자들이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다. 가해자는 그대로 병원에서 근무하지만, 피해자인 여성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난 1년 새 벌어진 의료계 내 성폭력 사건들은 가해자 대부분이 제대로 된 ‘징계’를 받았다. 달라진 사회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뒤에서 피해자들을 도운 한국여자의사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의사회가 의료계 성폭력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의사회 내에서조차 ‘성희롱, 성추행’ 등 성폭력 문제는 금기어였다. 의료계 성폭력 문제를 주제로 다룬 세미나의 제목에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차마 넣지 못했던 게 의사 사회의 분위기를 대변해 준다. 여의사회는 지난해 9월 28일 대한병원협회가 주최하는 ‘2017 대한민국 국제병원의료산업박람회(K-HOSPITAL FAIR 2017)’에서 의료계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를 개최했지만, 세미나 이름은 ‘의료기관에서 양성평등의 현재와 미래’였다.

여의사회 김봉옥 회장(충남대병원 재활의학과)은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세미나 제목에 양성평등이라고 밖에 못 썼다. 그 당시만 해도 성희롱, 성추행 같은 성폭력 관련 문제들을 의사들이 직접 다루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며 “발제자들이 수위 조절 등을 고민해서 세미나용 자료집도 미리 만들지 못했다. 1년도 안 된 얘기다. 발표 내용을 정리해서 여의회보에 게재한 게 첫 번째 기록”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의료기관 내 성폭력 예방·대처 역량 높이자’라는 제목이 여의회보 1면(2017년 9·10월호)에 게재된 것 자체도 이례적이라고 했다.

청년의사는 한국여자의사회 임원진을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여의사회관에서 만나 의료계 성폭력 피해 실태와 피해자를 돕기 위한 인권센터(가칭) 설립 추진 계획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왼쪽부터 여의사회 조종남 의권위원장, 김봉옥 회장, 이향애 부회장(차기 회장), 허주영 법제이사.

숨어야 했던 성폭력 피해자들

이처럼 여의사들끼리도 성폭력은 ‘감춰야 하는 문제’로 여겨졌다. 지난해 10월 강남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에서 벌어진 전공의 성추행 사건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드러난다. 성추행 사건이 벌어진 회식 자리에 여교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를 방조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법조계와 마찬가지로 의료계도 학연, 지연 등으로 얽힌 ‘좁은 사회’라는 점도 성폭력 피해자들을 숨게 만든다. 의사들은 의과대학 6년 동안 같은 수업을 듣고, 전공의 수련도 대부분 출신 의대가 속한 대학 부속병원에서 받는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이나 서울대병원 등 의대가 있는 대학병원들은 ‘순혈주의’를 타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최근 들어 의료계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 중 공론화된 사건들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순혈주의가 약한 병원들이라는 게 여의사회의 지적이다.

김 회장은 “모든 직장 내 성폭력이 동일하게 직위를 이용한 폭력이다. 상급자의 말을 거역하면 승진을 못 할지도 모르고 취업이 안 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불이익이 생길지 몰라서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는 게 있다”며 “의료계도 마찬가지로 석사 논문이 통과되지 못하거나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할까 봐 말하지 못하고 숨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순혈주의가 깨진 곳일수록 말이 나온다. 다른 학교 출신들이 섞인 의료기관에서 그나마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순혈주의가 강한 의료기관에서는 직장 상사이면서 학교 선배이다 보니 계속 만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말을 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여의사회 조종남 의권위원장(조윤희산부인과 원장)은 “남성 중심 사회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성희롱이나 성추행 같은 성폭력 문제는 여성 비하적인 생각에서 비롯된다”며 “시대가 변했으니 의사 사회도 변해야 한다. 의대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이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교육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권센터 설립 등 “피해자 도울 준비 됐다”

여의사회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숨어 지내야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 병협 주최 행사에서 성폭력 관련 세미나를 개최한 게 시작이었다.

여의사회는 두 달 뒤인 11월 한국여성변호사회와 ‘의료계 성폭력 대응 표준 매뉴얼 TF’를 구성했다. 병원마다 제각각인 성폭력 대응 매뉴얼을 표준화해 피해자들이 시스템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여의사회는 표준 매뉴얼을 개발하기 위해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또 ‘KMA Policy’에도 성폭력 관련 내용을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여의사회 내 성폭력 피해 신고를 받고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인권센터’(가칭)도 설치한다. 인권센터는 24시간 성폭력 피해 신고를 받고 대응 방법 등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법률적인 상담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여변호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여성변호사회와 구성한 TF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의사회 허주영 법제이사(서울아산병원 병리과)는 “인권센터는 가해자 처벌보다는 피해자를 보호하는 게 최우선 목표”라고 강조했다.

인권센터에서 성폭력 피해 상담을 할 수 있는 전문 인력도 양성할 계획이다. 상담을 맡을 여의사에 대한 교육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양평원)이 맡는다. 여의사회는 이미 지난해 4월 양평원과 업무협약을 맺고 양성평등과 폭력 예방 의식 확산을 위한 교육, 여성 의료종사자의 대표성 제고를 위한 교육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양평원에서 일정 시간 교육을 받은 전문 상담 인력이 양성되기 전까지는 여의사회 임원들이 상담할 예정이다.

김봉옥 회장은 “병원마다 성폭력 대응 매뉴얼은 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아도 처벌할 규정이 없다. 특히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에 대한 징계는 인사위원회나 징계위원회에서 결정되지만, 위원회 구성원 중 여성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라며 “병원별로 제각각인 매뉴얼을 표준화해서 현장에 적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 상담을 여의사들이 직접 할 수 있도록 양평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라며 “지금은 병원 내 행정직원 등이 상담을 하는데 피해를 본 여성의 경우 남성 직원에게 제대로 말하기 힘들다. 그래서 여의사들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조종남 의권위원장은 “성폭력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온갖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본인이 성추행 등을 당할만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피해 사실을 공개할지 말지 고민도 된다”며 “과거 경험을 총동원해서 도울 준비를 한 선배 여의사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허주영 법제이사는 “1차 피해도 크지만 2차 피해가 심각하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큰 피해가 없었더라도 나중에 피해자에게 적대적인 의사들이 분명히 나타난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며 “장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교육과 캠페인이 필요하다. 이건 남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로, 모두 같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기 여의사회장인 이향애 부회장은 “피해 현장에 빨리 가서 도움을 주는 게 가장 좋다는 걸 최근 일어난 성폭력 사건들을 조사하고 나서 알았다”며 “여의사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권센터 설립 등 성폭력 피해 방지 사업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왼쪽부터 한국여자의사회 허주영 법제이사, 김봉옥 회장, 이향애 부회장(차기 회장), 조종남 의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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