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사해의 물빛이 참 오묘하다. 건너편 요르단 땅이 연무에 가려 흐릿하다.(좌) 호수가의 층이 져있는 모습은 수면이 내려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듯하다.(우)

칼리아비치로 가는 길에 보는 사해의 물빛은 오묘했다. 연무가 끼인 듯 호수 건너편 요르단 땅이 흐릿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호숫가에 있던 관광단지가 지금은 2km나 떨어져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형편이다. 사해의 수면이 하강하는 데는 건조한 기후도 한 몫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최근에는 매년 1m씩 가파르게 수면이 낮아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인구증가와 농업의 확산으로 인하여 증가하는 물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갈릴리호수에 댐과 운하를 건설하였고, 요르단 역시 요르단강의 주요 지류에 댐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60년만 해도 13억톤의 물을 사해로 유입되던 것이 2000년 들어 2억9천만톤으로 줄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광산업체가 사해에서 끌어다 쓰는 물도 3억톤에 달하고 있어, 이대로 두면 50년 안에 사해는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뿐만 아니라 사해 주변 곳곳에서 싱크홀이 생기고 있다. 사해 수면이 내려가면서 빗물이나 하천에서 스며든 담수가 땅속에 숨어있는 소금층을 녹여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싱크홀이 언제 어디에서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당신이 앉아있는 사해 호수가 카페가 싱크홀 속으로 떨어져 내릴 수도 있다. 당국은 싱크홀의 존재에 대한 조사에 나섰고, 해수욕장은 물론 캠핑장, 밭들이 폐쇄되고 있다. 요르단과 이스라엘 정부는 사해수면 유지라는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홍해에서 아카바사막을 가로질러 사해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하고 있다. 홍해의 물을 사해로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환경론자들은 운하 통과지역이 지진발생대라는 점이나 홍해의 물로 인하여 사해에 조류가 번식할 가능성 등을 이유로 요르단강의 유량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하건설에 더 무게가 실려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적대적이던 양국이 협력하게 되는 부차적 효과도 있다.(1)

칼리아비치의 호수가에는 파라솔이 늘어서 있고, (좌) 호수가에는 ‘세상에서 제일 낮은 바’가 있다.(중) 사해의 머드팩이 유명하다는데 완벽하게 전신팩을 한 사람도 있다.(우)

마사다에서 버스로 1시간반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 칼리아비치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호수까지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을 보면 최근에 들어선 관광시설인가 보다. 일행 대부분이 사해에 몸을 담그러 나섰다. 젊은이들은 신문을 준비했단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인솔자와 현지가이드가 강조한 ‘눈에 호수물이 들어가면 실명할 수도 있어 생수로 씻어내야 한다’는 등 사해에 들어갔을 때 주의할 점은 아예 들어가지 말라는 정도로 들렸다. 물에 들어갔는데 물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을 터인데 그럴 때마다 생수로 눈을 씻어내는 것보다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인터넷자료에서는 눈에 관한 위험보다는 사해의 물을 삼키는 것에 주의할 것을 권고한다. 사해물의 염도가 아주 높기 때문에 다량의 사해물을 삼키면 건강한 성인이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어 병원으로 이송해서 위세척을 실시해야 하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노인들의 경우는 조금만 삼켜도 혈압이 올라가고 심한 경우에는 호흡곤란이나 심장발작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염도가 높아 사해에는 생물이 물고기 등 생물이 살지 않는다. 다만 박테리아나 다세포생물과 같은 미생물은 살고 있다고. 하긴 태평양 지하의 용암이 흘러나오는 곳에도 미생물이 산다고 하니 미생물의 생존력은 참 대단하다.

사해에서는 편하게 몸을 눕히면 뜬다. 굳이 팔을 휘젓지 않고 편안함을 즐기면 된다는데... 모사장님 부부처럼 (모호곤 사장님 제공)

워낙이 물과는 친하지 않은데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해에 들어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물에서 나와 몸을 씻고 말리는 것도 불편해서 남들 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물에 들어가기로 한 모사장님 내외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어주기로 했다.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 와중에 역시 구경만 하기로 한 아내가 진흙구덩이에 빠졌던가 보다. 도와달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 탓에 겨우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아내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사진을 찍느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내가 야속했던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주위 환경의 변화에 어두워지는 것 같다. 샘터를 찾아 아내가 뒤집어 쓴 진흙을 얼추 씻어냈다. 덕분에 머드팩을 한 셈이니 위안을 삼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몸을 씻고는 호수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일행을 기다렸다. 에어컨은 없지만 햇볕을 가리는 천막도 있고 대형 선풍기로 그나마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호수에서 나오는 일행들은 신기한 체험을 한 탓인지 밝은 표정이다.

예루살렘의 장벽. 이스라엘 거주지와 팔레스타인 거주지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좌) 돌담도 모자라 위로는 높은 철망까지 세웠다(우)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한 6시 무렵 숙소가 있는 베들레헴으로 출발하다. 숙소로 가는 길에 예루살렘을 지나면서 곳곳에 서있는 장벽을 볼 수 있다. 장벽의 안과 밖이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사람들의 주거지역을 둘러싼 장벽이란다. 장벽을 친 뒤로 범죄가 줄었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주장이지만 변명처럼 들린다. 어두워지면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예루살렘과는 달리 베들레헴에 있는 숙소는 팔레스타인지역이라서인지 거리의 분위기가 단숨에 바뀐다. 컴컴하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호텔부근은 좀 나은 듯 호텔도 깔끔하고 저녁식사도 나름 훌륭하다.

베를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8km 남쪽에 있는 해발 770m의 언덕 위에 자리한 마을이다. 베들레헴(Beth Lehem)은 히브리어로 집을 의미하는 베트(Beth)와 빵을 의미하는 레헴(Lehem)에서 유래했다. 빵집이라고 부를만큼 이 지역이 풍요로운 곳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창세기 25장 19절)”라고 적은 것을 보면 베들레헴이 아주 오래된 도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라헬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아내로 둘째 벤냐민을 낳는 과정에서 난산으로 죽었다.(2)

기원전 6세기에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인 123명이 이곳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예수가 태어날 때까지도 작은 마을이었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이 끝나고 요르단이 점령했지만, 1967년의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차지했다. 1995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베들레헴의 자치권을 넘겨주었다. 1947년에는 기독교도가 인구의 85%를 차지하였지만, 1967년 이스라엘 당국의 인구조사결과에 따르면 1,439명이 주민 가운데 기독교인은 46.1%였다. 현재 인구는 25,000여명이다. 이 지역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속하고 중동전쟁 당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의 비중이 높다.(3)

목자들의 들판교회 입구. 동네교회처럼 수수하다

여행 7일째이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돌아보는 일정이 만만치 않은데도 8시반에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숙소 밖에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버스가 늦나보다’하고 생각하는 순간 가이드가 앞장서며 따라오라고 한다. 버스를 타지 않고 일정을 시작하기는 처음이다. 알고 보니 이날의 첫 번째 일정인 목자들의 들판 교회는 숙소 근처에 있었다. 교회의 입구는 동네 교회처럼 수수했고, 작은 산책길을 따라가면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아담한 교회당이 나타난다. 교회당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함석지붕을 둔 야외 예배당이 나온다. 이곳에 세워진 십자가의 모양으로 보아서는 그리스 정교의 예배당인가보다. 예배당에서 내다보면 건너편에 야트막한 언덕이 보인다. 양을 친다고 해서 생각했던 드넓은 벌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스정교 예배당인 듯한 야외교회당. (좌) 건너편에 작은 언덕까지 그리 넓지 않아서 양을 지키기에 좋았겠다

목자들의 들판교회는 베들레헴 남동쪽 벳 사후(Beit Sahur)지역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하는 가톨릭교회이다. 천사들이 양치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알린 장소는 정확하게 전승되지 않고 있다. 다만 양치기의 땅이라 부르는 벌판을 굽어보는 곳에 동굴이 하나 있었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주 방문하던 곳에 기념교회를 지었던 것이다. 서기 4~6세기경에 목자들이 밤을 지새우던 몇 개의 동굴 위에 비잔틴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파괴되었고, 7세기에 교회와 수도원을 다시 세웠다, 서기 10세기 무렵 이집트가 침략했을 때 다시 파괴되었다가 16세기에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1951년에서 1952년에 걸쳐 비잔틴 수도원을 발굴하고, 4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 조각을 발견하였다.(2)

프란체스코회가 지은 가톨릭 성당(좌) 천정의 돔에는 작은 유리창을 붙여 별빛을 형상화했다.(중) 성지순례단인 듯 <천사의 음성을 듣는 목자들> 프레스코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

프란체스코회에서 지은 가톨릭 성당은 1953년 이탈리아 건축가 안토니오 바르루치(Antonio Barluzzi))의 설계로 지었다. 캐나다 정부의 지원으로 옛날 수도원 자리에 지은 성당은 베두인족의 천막에서 영감을 얻어 다섯 개의 애프스를 두었고, 작은 종을 닮은 돔을 얹었는데, 돔에는 작고 둥근 유리창을 붙여 마치 밤하늘에 별빛이 비치는 형상을 표현하였다. 교회 안에서는 1950년대에 그린 <예수의 탄생>, <베들레헴으로 가는 목자들>, <천사의 음성을 듣는 목자들> 등 프레스코 벽화를 볼 수 있고, 4세기에 그려진 모자이크화가 보존되어 있다. 교회 안에 들어섰을 때 마침 성지순례를 나선 분들이 입장해 있었던 듯 성경을 펼쳐들고 <천사의 음성을 듣는 목자들>을 설명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림을 구경하거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 그 사이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예수탄생기념교회(Church of the Nativity)로 갔다. 작은 동굴이라는 의미의 성지 그로토(Grotto)는 나사렛 예수가 태어난 장소를 의미한다. 서기 135년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그로토 위에 미와 욕망의 신 아도니스를 모시는 신전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이곳을 방문한 황제의 모후 헬레나의 발원으로 아도니스신전을 허물고 교회를 짓게 되었다. 교회는 327년 짓기 시작하여 333년에 완공되었다. 교회는 세 가지 중요한 건축물로 이루어졌다. 예수가 태어난 곳으로 여겨지는 곳에 8각형의 로툰다(rotunda)와 45 x 28m 크기의 사각형의 고실(atrium) 그리고 29 x 28m 크기의 이중 통로가 있는 앞뜰(forecourt)이다. 이때 지은 교회는 529년 또는 556년의 사마리아인의 반란 중에 불타버렸다. 556년 사건에는 유대인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교회는 비잔틴제국의 유스티아누스1세 황제가 565년에 재건한 것이다. 614년 호스로2세(Khosrau II) 시절의 사산왕조가 침공했을 때도 손상을 입지는 않았다. 십자군이 건설한 예루살렘 왕국의 첫 번째 왕의 대관식이 열린 이래로 건물을 보수하고 추가로 지어 오늘날 12,000㎡에 달하게 되었다. 예수가 탄생한 장소에 은으로 된 예루살렘의 별을 두었는데, 1847년 생긴 이 별의 절도사건을 계기로 프랑스가 크림전쟁에서 오스만제국, 영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와 싸우기도 하였다.

1244년 맘루크 계열의 콰라즈미안(Khawarazmian) 왕조의 침략 당시 교회의 지붕이 손상을 입었고, 1480년 영국, 브르고뉴공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협력하여 복구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1834년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교회의 종탑, 그로토의 일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1836, 1837년의 여진으로 피해가 추가되었다. 2013년부터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의 참여로 교회의 대규모 복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4)

예수탄생기념교회의 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좌), 맞은편에는 무슬림들의 건물인 듯 초승달이 매달려 있다.(우)

예수탄생기념교회의 본당은 예루살렘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가 관할한다. 본당은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선 5개의 통로와 애프스가 동쪽 끝에 있는 전형적인 로마 대성당의 구조로 설계되었다. 측면의 벽에는 금색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는데, 이제는 많이 손상되었다. 본당에 들어가려면 아주 낮은 겸손의 문(Door of Humility)을 지나야 한다. 처음 본당을 지었을 때는 문이 높았지만, 뒤에 보수하면서 높이를 낮춘 아치형으로 하였다가 오스만제국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형태로 더 낮추어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말을 타고 본당에 들어가는 실례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사해.

(2) 하은교회 자료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의 들판 교회.

(3) Wikipedia. Bethlehem.

(4) Wikipedia. Church of the Na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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