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측 ‘의사에 도움 요청’ 매뉴얼 마련…醫 “도운 의사에게 책임 물으면 안돼”

한의원에서 봉침시술을 받은 환자가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 쇼크로 사망한 사건이 ‘선한 사마리아인 면책’ 논란으로 번졌다. 한의사를 도와 환자를 응급처치했던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9억원대 민사소송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특히 봉침시술을 한 한의사 측에서도 의료과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돕던 의사에게 민사적인 책임을 묻는다는 사실에 의료계는 공분했다.

한의사 측 변호를 맡은 이지언 변호사는 이번 사건을 다룬 SBS ‘궁금한 이야기 Y’에 출연해 응급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을 마련해 놓았고 그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의료과실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한의사가 마련했다는 매뉴얼에는 응급상황이 생기면 응급의약품인 ‘에피네프린’을 구비한 가정의학과 전문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한의원과 가정의학과 의원은 같은 층에 위치해 있다.

이 변호사는 “비상시를 대비해서 얼음팩을 준비하고 같은 층에 있는 가정의학과 의사가 응급의약품인 에피네프린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관련 대처 매뉴얼을 충실히 만들어 놓았다”며 “119 연락보다 에피네프린 투여가 더 최우선으로 이뤄져야 하는 응급처치였다. 그래서 가정의학과 의사를 모시고 와서 긴급하게 에피네프린 투여가 이뤄졌던 것이고 거의 그와 동시에 119에 연락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19 연락이 늦었다거나 의료과실이 있다고 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족 측은 봉침 시술을 한 한의사를 형사 고소하고 한의사와 가정의학과 의사를 상대로 9억원대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유족 측 변호를 맡은 법률사무소 해울 신현호 변호사는 본지와 통화에서 “처음부터 (현장에) 오지 않았다면 몰라도 응급 상황에 갔다면 보증인적 지위가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직접적인 불법 행위자가 아니더라도 한의사를 도와주러 갔다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일반인에게 요구되는 정도의 주의의무)를 해야 한다”고 했다(관련 기사: [단독]봉침시술로 사망한 환자 응급처치했던 의사 ‘피소’).

“한의원이 만든 매뉴얼? 그렇더라도 도운 의사가 책임져야하나”

대한의사협회는 봉침 사건의 불똥이 엉뚱하게 가정의학과 전문의에게 튀었다며 반발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응급의료법을 개정해 선의로 한 응급의료나 응급처치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협 최대집 회장은 지난 29일 서울 용산임시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요청을 받고 돕기 위해 갔는데 그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언제든 민사상 책임을 지울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논리로 문제를 제기하면 응급상황에 누가 최선을 다하겠느냐”고 비판했다.

최 회장은 이 때문에라도 응급의료법 제5조의2와 제63조에서 ‘중대한 과실’ 여부를 삭제해 고의가 아니라면 응급처치를 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관련 기사: “선한 사마리아인은 보호해야”…의협, 응급처치 완전 면책 요구).

봉침 시술을 한 한의사 측이 응급상황 시 같은 층에 있는 가정의학과 전문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매뉴얼을 정해 놓았더라도 그 자체가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근거가 돼선 안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의협 김해영 법제이사(변호사)는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한의사와 그런(응급상황에서 돕는) 계약 관계를 맺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환자를 도운 의사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는 건 말이 안된다”며 “보증인적 지위를 인용해 관여했으면 무조건 책임을 지라는 건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는 “명시적인 관계가 성립되지도 않았는데 응급처치를 도운 의사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며 “이번 사건과 비슷한 응급상황이 생기면 다른 의사들이 돕겠느냐.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까지 가면 응급 매뉴얼을 만들기는커녕 응급처치를 해 달라는 연락이 와도 피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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