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의원 김시영

희미하지만 느낄 수 있다. 가슴을 눌러 생기는 혈관의 벌떡거림 사이의 이것은 분명히 맥박이다.

“잠깐만.”

입으로 오더를 쏟아내며 눈은 모니터에 고정하고 손으로 대퇴 동맥이 지나갈 허벅지 안쪽을 짚고 있던 내가 짧은 한마디를 뱉는다. 그 말과 동시에 침상에 올라타 있던 후배가 압박을 멈췄고 땀으로 젖은 그의 시선과 함께 나를 포함한 모든 소생팀의 눈이 일순간 숨죽이며 모니터를 향한다.

“돌아왔네.”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잠깐의 정적이 끝나자마자 내 입에서는 새로운 오더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오고 소생 구역의 모두는 이내 각자의 역할을 찾아 다시 분주해진다. 물론 뇌를 포함한 신체 기능 전부가 온전히 살아나기엔 아직 멀었지만, 최소한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며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이 환자는 입원 준비가 끝나는대로 중환자실로 올라갈 것이다.

삶과 죽음의 위태로운 경계에 놓인 이를 이 세상으로 다시 끌고 오기 위해 늘 시간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응급의학과 의사였던 나는, 그래서 어떤 환자를 만나든 ‘이 사람이 당장 죽을 것 같은가’를 먼저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 나에게 죽음이란 어쩌면 패스트푸드와 닮아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이 소멸하는 일은 그가 얼마큼의 삶을 살아왔는가와 상관없이 그저 몇 분 안에 결정되기도 했으니, 햄버거를 주문하고 기다리다 쟁반을 받아 드는 그 시간보다 때론 짧았다. 세상 누구도 피하고 싶을 그 급한 사건을 맞닥뜨린 사람은 1초라도 빨리 나를 만나야 했고, 나는 일하는 내내 그런 급한 환자들이 뒤로 밀리거나 숨겨지지 않도록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했다. 그래야 꺼져가는 숨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일들이 지체 없이 시작될 수 있었고, 그렇게라도 뛰어 다녀야 죽음이 아닌 삶으로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더 기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게 환자는 다 같은 환자가 아니었다. 지금 눈앞의 이 사람보다 더 급한 누군가가 응급실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아니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지금 당장 내 앞에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긴장으로 나는 살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가끔 친구나 가족이 의사인 내게 뭔가를 물으면, 아무리 사랑하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내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야, 나 지난주에 회사에서 검진했는데 공복 혈당이 120인가 나왔다고 재검 받으라던데.”

“괜찮아, 안 죽어.”

“OO언니 알지? 그 언니가 저녁에 생선회를 먹고 두드러기가 났다고 그러네?”

“숨차대?”

“잠시만. 아니, 숨은 안 찬대.”

“괜찮아, 안 죽어.”

“아빠 나 배 아파.”

“토하거나 설사했어?”

“설사만 두세 번 정도.”

“일루 와봐. 음, 일단 열은 없고. 배가 막 죽을 거 같이 아파?”

“아니 살살.”

“괜찮아, 안 죽어.”

죽을 만큼 위험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안심과 위로의 말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지금 당장 급한 것이 아니니 더 이상 별 관심이 없다는 생각도 솔직히 섞여 있었고 그래서 ‘괜찮아, 안 죽어’라는 말은 어쩌면 이제 그만 대화를 끝내자는 내 이기적인 통보였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가 가진 소소한 지식과 두꺼운 팔뚝은 누군가가 죽음을 넘나드는 사건에서나 그나마 쓸모가 있었으니, 결국 나는 효용성 있는 그 일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었고 그 급하게 닥쳐오는 ‘괜찮지 않은’ 일들에서 나의 가치를 찾으려 했다.

햄버거 만드는 것보다 바쁘고 급한 일들 때문에 밥보다 햄버거를 더 자주 먹어야 했던 날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던 언젠가, 내게 조금 특별한 죽음이 찾아왔다. 수십 년간 동네의원을 지키던 오랜 지인이 나에게 자신의 자리를 부탁하고 떠났다. 나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사 면허를 받은 이후로 10년 가까이 벗어나 본 적이 없던 응급실을 결국 포기했다. 그의 유지를 따르기로 결정했지만, 그 결정 말고 정작 내가 준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장까지 피가 튀는 와중에 잘려나간 팔다리를 찾아 맞추던, 힘껏 흔드는데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환자의 목에 손을 갖다 대며 후두경을 달라고 외치던, 그렇게 매일 온갖 죽음을 내 손으로 경험하던 공간에서 고작 열흘 사이에 시장 근처 작고 오래된 동네의원의 청진기 하나 달랑 올려진 책상 앞으로 옮겨진 나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병원의 2층 계단을 올라오느라 숨이 차다고 하는 할매는 ‘심장이나 폐가 안 좋아서 그럴 수 있으니 큰 병원에’라며 보냈고, 소화가 안 된다고 온 할배는 ‘심근 경색이 체한 것처럼 오기도 하니 지금 당장 응급실에’ 하면서 또 보냈고, 기침 한다고 온 아줌마는 ‘이건 그냥 집에서 물 드시고 쉬면 나아요’ 라며 집으로 보냈고, 당뇨와 고혈압 때문에 온 아저씨는 ‘제 전공이 아니라서’ 하면서 근처 내과로 보냈고, 회사일로 이틀 밤을 꼴딱 새서 힘들어 죽겠다며 영양제 수액 좀 맞고 싶다는 청년은 ‘그 돈으로 고기나 사 먹지 뭔 영양제’ 라며 돌려보냈다.

환자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왜냐면 그게 내가 의사가 된 이후 배우고 해오던 일이었고 그래서 내게는 그것이 최선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 어쩔 수 없는 최선에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환자들과 싸우는 일은 갈수록 늘어났고 짜증은 점점 나의 일상이 되어갔다. 이딴 걸로 왜 병원에 올까 싶은 증상들을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하는 환자들이 싫었고, 응급실 가라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도 말을 못 알아먹는 귀 어두운 노인네들도 싫었다. 나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던 ‘죽고 사는 환자들’은 그전에 관심도 없던 ‘괜찮아, 안 죽어’ 수준의 환자들로 바뀌고, 진료의 우선순위는 증상의 경중 따위 상관없이 그저 선착순으로 변해 버린 그 현실을 나는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벌써 10년이 더 흘렀다.

저런 짓거리를 하고서도 여태 안 망하고 아침마다 병원문을 열어 ‘괜찮아, 안 죽어’ 환자들을 꾸역꾸역 만나고 있으니 나도 어쩌면 이 생활에 조금은 적응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내게는 제세동기도 인공호흡기도 CT도 응급 검사도 그리고 눈앞에서 죽고 사는 환자들도 없지만 웬만한 고민은 결국 시간이 보듬어주듯, 내 곁을 쉼 없이 흘러간 날들과 함께 그저 무뎌진 건가도 싶다.

매달 혈압약 받으러 오던 할매가 오늘은 감기로 왔는데 어쩐 일인지 진료가 끝나도 나가지를 않는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 물었더니 할매는 기다렸다는 듯 폭풍랩을 발사하신다.

스무살도 안되어 얼굴 한번 못 본 남자한테 시집을 왔다는 것으로 시작한 가사는 밤낮 없이 무한 반복되던 집안일과 농사일을 지나 자식 다섯을 낳고 키우고 학교 보내고 출가 시키고 손주들까지 봐줬다는 현란한 전개를 거쳐 결과적으로 요즘 허리며 다리며 안 아픈 데가 없다는 후렴부에 이르러 끝도 없는 도돌이표 구간에 들어갔는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시집 온 이후로 60년 넘게 여태 밭일을 하고 앉았으니 이건 뭐 어디 아픈 데가 없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할매.”

“응.”

“이제 그만 해요 밭일.”

“집구석에 영감이랑 둘이 있는데 그럼 누가 해 저거를.”

“아니 올해 할매 나이가 몇인데 그걸 아직도 해요. 할 만큼 충분히 했잖아요 그 동안.”

“하기사 이 나이 먹었으믄 이제 그만 가야지.”

“쓸데없는 소리. 하여간 약이나 잘 드시고, 기침 혹시 안 끝나면 다시 오세요.”

“아이고 이누무 팔다리….”

여든이 넘은 나이로 하루 종일 밭에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하고서는 다리가 아프다며 아이고 소리를 하고 앉아 있는 할매가 평생을 그리 살아온 것도 모자라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게 뻔한 이 상황에 나는 조금 신경질이 났다. 어쩌면 허리 꼬부라진 이 노인네한테 왼 종일 밭일을 시킨 빌어먹을 열무 모종들한테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것도 아니라면 지리멸렬하고 답 안 나오는 이 대화를 그만 끝내고 싶었는지도.

“할매.”

“왜.”

“괜찮아, 안 죽어요.”

문득 치밀어 오른 그 답답함 때문이었을까. 정말 간만에 나의 오랜 유행어가 불쑥 튀어 나왔다. 내 의도를 제대로 읽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할매는 아프다며 다리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별 말 없이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조용히 돌아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 이 말이 아직도 먹히네.’ 같은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진료실을 나가려던 할매가 그 꾸부정한 몸을 다시 돌려 나를 찬찬히 그리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인사를 하시려나 하고 마주보며 기다리는 내게, 할매가 말한다.

“다 죽어, 사람은.”

나는 당황했다. ‘아니 내 말은 팔다리 쑤시고 아픈 게 당장 죽을 일은 아니라는…’이라며 주절주절 변명할 틈이 요만큼도 생기지 않을 만큼 말문이 막혔다. 사실 내 말이 맞는지, 할매 말이 맞는지 따질 이유도 겨를도 그럴 의지도 내겐 없었다. 할매는 어느새 진료실을 나갔고 허둥대던 나는 ‘지금 당장 벌어지지 않을 일’과 ‘언젠가는 반드시 생길 일’ 사이 어디쯤에 혼자 남겨졌다.

안 죽는다, 그러나 다 죽는다.

어쩌면 이제 나와 엮이는 죽음은 더 이상 분 단위로 만들어지는 패스트푸드 점의 햄버거가 아니라 밤새 끓여낸 저 시장통 순대집의 뽀얀 오소리 국밥이나 추어탕집 사장님이 꼬박 1년을 묵혀 반찬으로 내주는 묵은지 정도가 된 걸 수도 있는데, 그래서 이제 나에게 죽음이란 환자의 심장이 멈추어 빨랫줄마냥 늘어진 심전도를 확인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저 내가 아는 누군가가 고단했던 삶의 여정을 마치며 내게 써놓고 간, 언제 열어보게 될지 알 수도 없는 편지 한 통쯤으로 변하고 있는데 나는 이미 국밥집에 들어와 놓고도 여전히 햄버거를 주문하고선 나오지도 않을 음식에 스스로를 재촉하며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뭐, 가끔 저렇게 국밥집에서 햄버거를 찾는 바보짓을 하지만 부끄럽거나 그렇진 않다. 나는 아직 모자라고, 그래서 더 배워야 하니까.

주인아줌마한테 한 소리 듣더라도 어쨌든 순대국 하나 주문해놓고서, 옆 테이블 아재들과 ‘요즘 경기가 진짜 너무 안 좋아’ 같은 쓸데없는 소리나 하며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국밥이 나오면 그저 호호 불며 맛있게 먹으면 될 일이니까.

맨 날 죽겠단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여전히 고된 밭일 척척 해내고 있는 나의 튼튼한 선생님들에게 그 마지막 밥상이 조금만 더 천천히, 그리고 친절하게 배달되기를 몰래 바라면서 말이다.

의사라는 직업으로 살아온 지 이제 꼭 20년이 됩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시간 동안 과연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가끔 생각을 합니다. 나이 먹고 결혼하고 아이가 크고 이사를 몇 번 다니면서 살림살이가 바뀐 것은 이 직업과 무관한 시간의 작품이니까 그 부분을 뺀다면 도대체 20년의 의사 생활이 내게 가져다 준 결과물은 뭘까가 궁금했습니다.
사실은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일년같이 길지만 일년은 하루같이 짧은 것이 시간인지라 그저 정신 없이 세월을 흘려 보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뭐라도 남은 게 없을까 열심히 찾아 보다가, 문득 일하면서 달라진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근무 환경이 너무도 극적으로 변화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사실 저는 그 바뀐 상황과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바뀌고 싶지 않아서 버티거나 변화가 두려워서 거부했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없이 깨지고 다시 고민하면서 결국 저는 일종의 타협을 했는데 그건 어쩌면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서 휴대폰을 눈에서 한 뼘쯤 더 멀리 놓고 보는 식의 타협과도 비슷했습니다. 늙어가며 근력이 떨어지고 순발력이 감소하고 흰머리가 늘어가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야 하듯, 내가 만나야 하는 환자들이 바뀌고 내게 주어진 일이 달라졌다면 그 변화된 상황을 받아 들이고 순응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조금은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그래 봐야 아직은 모자라기만 합니다. 그래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배우고 그렇게 같이 진짜 어른이 되어 가는 거겠죠.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하는 2019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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