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정신건강의학과 실습을 돌았을 때 만났던 환자가 있다.
지난 30년간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에 빠져 있던 환자였다. 정신과 입원만 9번째라고 했다. 30년 전 처음 나타난 망상은 그 내용이 약간씩 바뀌었을 뿐 줄기는 크게 변함이 없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30년 내내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산 것은 아니었다. 망상이 마치 파도처럼 악화와 완화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을 꾸준히 복용해 망상이 없어질 즈음이면 자의적으로 복용을 중단해버린 게 문제였다.

환자들은 왜 약 복용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는 걸까.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약물의 부작용 때문이다. 그에게도 ‘추체외로 증후군’ 증세가 이있었다. 추체외로 증후군은 항정신병약물 복용 이후 불수의적이고 비정상적인 근육 운동이 나타나게 되는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환자의 삶의 질과 약물 복용의 동기를 크게 저하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나머지 하나는 병식의 결여다. ‘병식’은 쉽게 말해 ‘환자 자신이 병에 걸린 상태임을 인식’하는 것인데 정신질환자 중에는 병식이 결여된 환자들이 특히 많다. 사람은 자신이 아프다고 느낄 때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복용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병식이 결여되면 환자로서는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으려는 동기가 사라진다. 본인이 아프다고 느끼지 않는데 스스로 약을 챙겨 먹을 리 만무하다. 내가 만났던 환자도 그런 이유로 약물 복용과 중단을 반복하며 지난 30년을 허비해 왔다.

하지만 정신질환자들의 약물 복용 중단이 위험한 이유는 지속적인 치료가 안될 때 정신병적 증상의 재발 위험이 증가하는 것을 넘어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故 임세원 교수 사건’ 등과 같이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정신질환자들이 퇴원 이후에도 계속 병원을 찾아 치료 받을 수 있는 외래치료명령제 같은 시스템이 정착될 필요가 있다. 외래치료명령제가 제대로 작동됐다면 임세원 교수 사건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세원 교수 사건 이후 재발방지책으로 정신질환자들의 ‘강제입원’ 요건을 다시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강제입원 요건이 완화된다면 정신질환자들의 범죄가 줄어들까. 정신질환자의 치료는 입원 치료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퇴원 환자에 대한 지원 시스템이 없는 상태에서 입원치료 강화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필자가 정신과 실습을 돌면서 보고 느꼈던 것도 퇴원 이후가 더욱 치료 성적에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국회에서 임세원법 논의가 한창이다. 진료실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도 논의되고 있고, 강제입원 요건을 완화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사회적 입원치료는 물론 퇴원 이후 정신질환자들의 치료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할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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