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우 분당제생병원 내과

의사 아닌 환자가 된 기분은 낯설고 또 힘겨웠다. 세 시간이나 기다려 내 담당의를 만났건만 그다지 호감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다리지 않은 흰 가운을 대충 걸친, 키 작은 흑인 의사였다. 단정하지 않은 용모도 그렇거니와 흑인은 의학보다는 스포츠나 음악이 어울린다는 나의 인종적 편견, 무엇보다 이 사람 귤 냄새를 엄청나게 풍겨 댔다. 나를 만나러 오기 방금 전까지도 먹은 게 분명했다.

내게 귤 냄새는 거의 악취에 가깝다. 귤이 왜 싫은지 어떤 정신적 트라우마도 기억에 없어 그 이유가 아직도 미스테리인데, 귤 아니더라도 형제 정도 되는 오렌지, 레몬, 자몽, 낑깡 그리고 제 아무리 고가라는 한라봉 할아버지까지 냄새조차 소스라치게 싫다. 이 귤놈들의 신 맛은 인상을 찌푸려뜨리고, 실수로라도 입에 넣게 되면 바로 뱉어야 한다. 가끔 어린 아들을 위해 귤 냄새를 참아 가며 껍질을 까주기도 하는데, 내게는 피붙이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간신히 해 낼 수 있는 일에 가깝다. 어쨌든 병실에서 마주한 내 담당의라는 자의 첫 인상은 이런 이유에서, 시각적 근거 뿐 아니라 후각적으로도 소위 비호감 그 자체였다.

모든 응급 환자가 그렇겠지만 나도 응급실 입원은 미처 생각 못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레지던트 하면서 모처럼의 휴가, 그것도 아내와 로맨틱한 한주를 프랑스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대학에 있는 아내는 파리에서 열리는 학회를 등록해 나와 휴가 기간을 맞췄다. 에펠탑, 몽마르뜨 언덕, 퐁 네프와 세느 강…. 연인들의 필수 코스라는 파리의 구석구석을 밟으며 신혼 때로 돌아간 기분에 행복하기만 했다.

여행 중 스트레스를 굳이 고르자면, 안전을 책임질 보호자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예측 못할 위험은 어디나 도사리고 있다. 나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다. 집착적으로 안전에 신경 썼고 노을을 보며 예쁘다고 좋아하는 아내에게 빠른 귀가를 종용했다.

그런 내가 머리를 다쳤다. 위험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호텔 방 안에서 말이다. 아내는 여행 마지막 날 귀국 짐을 싸다가 금고에 넣어둔 귀중품을 잊고 갈까 불안해 금고 문을 열어두었다. 공중에 떠 있는 이 묵직한 쇳덩이를 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샤워하고 안경을 벗어 잘 안 보이는 상태에서 머리 위의 흉기에 두정부를 세게 부딪혔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짐 싸던 아내가 놀라 달려 왔다.

정신을 0.01초 정도 잃었을 수도 있다. 너무 아파서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아내가 걱정스런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만져 보았다. 움푹 패여 있었고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휴지로 한 동안 압박해 보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지속되는 출혈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세게 눌렀을 때 안으로 푹푹 들어가는 양태였다. 뼈가 손상된 건 아닐까? 혹 두개골 안쪽으로 출혈이 있지는 않을까?

내 두려움은 사실 근거 있는 것이었다. 내과 레지던트를 하기 전, 인턴 때 응급실 파트를 꽤 오래 맡아서 했다. 장장 4개월이나 되는 긴 기간이었다. 근무시간이 길고 업무강도도 높은 응급실 인턴이 유독 길었던 이유는 동기애 때문이었다.

인턴들은 1년의 수련을 마치고 내과, 외과, 피부과 등 각 의학 분과로 신규 입사한다. 그래서 수련이 끝날 즈음 해선 대부분의 인턴들 거취가 분과에서 내정되는데 이를 소위 픽스턴이라 한다. 이들은 원내에 계속 있을 수도, 외부 병원으로 가기도 한다. 원내 픽스턴은 어차피 시작할 분과 수련을 인턴 말부터 좀 빨리 시작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려면 해당 분과 근무 예정인 인턴과 자기 스케줄을 바꿔야 한다. 나는 외부 병원 픽스턴이었고, 어차피 근무는 해야 하니 남은 스케줄을 원내 픽스턴 동기들과 바꿔주었다. 그런데 하필 그 스케줄 모두가 응급실이었던 거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응급실 인턴이 힘들기는 했지만 달이 지날 수록 숙련도가 올라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때 뇌출혈이 생각보다 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터지는 사람도 많고 외상성이 그렇게까지 많은지는 몰랐다. 술 먹고 자빠지고, 교통사고, 패싸움,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한 번은 한 만취자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왔는데 검사를 완강히 거부하고 집에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사망했다고 들었다. 그 때 내가 초진을 봤는데 바깥에서 보기에 살짝 긁힌 것 말고는 별다른 외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죽음에 이르렀다니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두부외상.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었다. 상처가 작다 해도 응급실에서 본 게 있으니 덜컥 겁이 났다. 상처를 직접 보고 “괜찮으실 거에요”라고 안심시켜 줄 의사도 없었다. 몇 센치인지 깊이는 얼마나 되는지 설명해 줄 의료인이 필요했다. 구역감이나 두통이 없어 괜찮을 것 같았지만 내 일이 되고 나니 자신 없었다. 피가 안 멈추니 겁났고, 상처를 직접 볼 수 없어 겁났고, 아내가 울먹이는데 나도 잘 모르겠으니 달래줄 수 없어 겁났고, 무엇보다 이 곳은 아름다운 파리 - 이 아름다움의 이국적 성격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날카롭게 이방인으로 분리할 것이기에 두려웠다. 한국에서 같은 상황이었으면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전문가에게 달려가 VIP 대접을 받으며 고급 조언을 구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말 잘 안 통하는 외국인 환자일 뿐이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던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내는 내 병원 응급실에 국제전화를 걸어보라 했다. 옳은 판단이었다. 전화비 백만원이 나오든 그게 대수겠는가. 당황한 내가 스스로 내리는 허술한 의학적 판단보다는 나아 보였다.

“네, 응급실입니다.”

“저 내과 레지던트 아무개 인데요.”

“아 네. 선생님. 내과 환자 없는데 무슨 일이세요?”

“실은 저 오프(근무 이외 시간)고 지금 국제전화 인데요. 프랑슨데 머리를 다쳐서요. 오늘 응급실 과장님 좀 연결해 주실수 있으세요?”

한국은 새벽시간이었다. 전화를 받은 간호사는 곤란해 하며 과장님이 방금 전 쉬러 방으로 들어가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를 연결해 주겠단다. 그 레지던트가 누구냐 물었더니 1년차인 학교 후배였다. 1년차 후배가 못 미더운 건 아니었지만 끝내 과장님 연결을 안 해 주는 간호사가 야속 했다. 응급실 총 책임자인 상급자를 깨우기 부담되는 그녀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어차피 상처도 못 보여주는데, 경험 많은 과장님의 한 마디가 더 듣고 싶었다. 지금 혼자 있어 정신변화라도 생기면 어쩌냐고 약간 거짓도 섞어 호소했지만 끝내 먹히지 않았다.

‘내가 남인가? 저년차 때 낮이고 밤이고 내과 환자만 있으면 응급실 가서 몸 바쳐 일했는데, 먼 타국에서 타는 내 속도 모르고….’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후배와 통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배는 병력을 듣더니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말이 내 판단과 일치했다. 내가 환자를 봤다면 나라도 그처럼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을 것 같다’와 ‘괜찮아’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환자가 되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만한 것이었다. 아내는 이 정도로는 불안감을 풀지 못했다. 우리는 사이 좋은 부부여서 내게 0.1퍼센트라도 불확신이 남아 있다면 그녀는 반드시 알아챈다.

통화를 마칠 즈음 후배는 안심보다 더 듣기 좋은 정보를 건넸다. 과장님이 지금 깨어 계신다는 거다. 나는 고맙다 인사하고 과장님께 직접 통화를 시도했다.

“별 일 없을 거야. 불안해 하지 말고, 슈쳐(Suture: 봉합) 정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근처 응급실에 가 보란 말이었다. 너무 당연한 권고였다. 생각해 보니 어이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환자로서의 나는 의사인 나와 전혀 다른 인격이었다. 내 임상경험도 못 믿고, 환부도 못 보여줄 지인 의사에게 새벽에 전화해 응급실 갈지 말지를 물어보는, 그런 진상 환자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름의 사정으로 흥분해 있으니 남들이 그 점을 어떻게든 이해해 주길 바라는 그런, 의사의 인격이었다면 혐오했을지도 모르는 사람 말이다.

다행히 부근에서 가장 큰 병원이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였다. 나와 아내는 추운 밤길을 걸었다. 낮 동안 로맨스로 쓸었던 그 길을 피 흘리며 걸어가자니 처량해 미칠 지경이었다. 거리에는 불량한 치들이 드문드문 걸었다. 이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을만 코빼기를 비춰도 잽싸게 숙소로 들어 갔었는데, 숙소가 안전하지 않아 다시 거리로 나와야 하는 신세에 헛웃음이 나왔다.

파리 응급실 입구는 우리네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앰뷸런스가 거센 라이트를 빙글빙글 돌려대고 있고, 구급대원들이 응급실 이송을 끝마치고 안도하며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응급실 내부는 많이 달랐다. 대기 환자가 적지는 않았다. 반면 그 많은 환자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그야말로 제로였다. 적막 그 자체, 시끌시끌한 한국 응급실과 대조적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모습은 상체 전반에 붕대를 칭칭감은 한 중환이 처치실로 이송되는데 신음소리 내는 걸 참으며 낑낑거리는 것이었다.

‘이 곳에선 아파도 소리 내면 안 되는가.’

말하자면 성지에 가까웠다. 내가 아는 병원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현지인들조차 그 권위에 순순히 응하는 모습에 의기소침해졌다. 이방인으로서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 때부터 겪는 모든 낯선 사건들이 나를 주눅들게 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랬다. 이들은 나를 ‘닥터 양’이 아닌 ‘미스터 양’으로 부르니 말이다. 같은 파리라도, 응급실에서는 미술관처럼 행동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미술관에서 르노와르의 몰랐던 그림을 발견해 놀라움에 소리 지르고 싶어지면 맘대로 해라. 하지만 여기서라면 큐레이터가 쫓아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낯선 것들을 얌전히 지켜보며 세 시간을 보냈다. 유니폼 위로 명품 스카프를 두른 간호사부터, 혈압 맥박 하나도 안 재고 산소포화도만 보는 이해 못할 바이탈(Vital: 생체신호) 측정을 하는 간호사, 그러면서 왜인지 정맥 채혈은 하겠다는 간호사, 어느 헐리웃 액션영화의 대머리 주인공을 닮은 위압적인 남자 간호사를 거쳤다. 그래도 잘 참았다. 세 시간의 인내는 나를 복도 끝 진료실로 인도했다. 진료실 안 베드 위에는 나를 위한 환복이 놓여 있었다. 나는 옷을 갈아 입었다.

환복까지 입혀 놓으니 진짜 환자 같았다. 때마침 피가 볼을 타고 주륵 흐르니 더욱 그랬다. 그 모습을 본 아내는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서로 자기의 부주의였다며 미안함을 고백했다.

또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고요한 방에 둘이 앉아 마냥 기다리자니 간신히 쉴 곳을 찾은 피식자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무슨 소리만 들리면 귀를 쫑긋 세웠다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긴장을 푸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이 귤 냄새 풍기는 흑인 의사가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세 시간 기다림의 결과 치고는 약간 실망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한 편 마침내 의사를 만났으니 당연히 기쁘기도 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여보시오. 나도 의사요. 비록 레지던트지만 나름 산전수전 겪은 내과 3년차란 말이오. 환부 좀 봐 주고 의사 대 의사로 속 시원히 설명 좀 해주시오.’

나는 미리 준비해놓은 프랑스어 문서를 꺼냈다. 내 간단한 소개와 병력, 궁금한 점을 영작하고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글이었다. 당연하지만 퇴고까지 거친 작정하고 쓴 글이었는데, 내 신분과 더불어 의학적으로 잘 정리된, 그리고 예의 바른 글을 읽은 그가 약간이라도 감동하길 바라는 목적이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낯선 곳에서 의사이기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좀 더 잘 대해주길 바라는 바람이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병원이란 곳에 내 의지할 ‘아는 사람’이 없어 심적으로 불안했다. 나는 이 의사를 내 ‘아는 사람’의 범주에 넣고 싶어했다.

하지만 의사는 얼핏 훑더니 별다른 말도 없이 신체진찰을 시작했다. 내가 가져온 문서에서 알고 싶은 모든 내용을 다 파악했는지 아무 질문도 없었다. 마침내 상처를 씻고, 보고 말했다.

“꿰매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꿰매면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래 전 내가 직접 두피를 꿰맨 어떤 환자를 떠올렸다. 그 때 그는 별로 안 아프다고 했다. 나도 그랬으면 했다.

파리 온다고 미용실에서 신경 써 조각한 헤어가 가장 먼저 댕겅 잘려 나갔다. 국소 마취제를 뿌리니 혈액이 떨어져 환복에 혈흔을 만들었다. 진짜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곧 바느질이 시작된다. 첫 땀을 뜰 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파요?”

“아뇨.”

아까 그의 첫 인상이 나쁘다 했던가? 그 말 수정한다. 그냥 낯선 인상이라고만 해 두자. 그는 나쁘지 않은 의사였다. 아니, 실은 꽤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앳된 얼굴에 숙련된 기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느린 손과 신중한 눈빛이 그 증거였다. 그는 그간 연마한 손놀림으로 내 두피 안으로 실을 밀어 넣고 당겨 빼 휘감고 잘랐다. 통증 여부를 면밀히 관찰했고, 몇 땀 뜨면서 열 맞추기에 고심했다. 모든 과정은 편안하게 진행되었다. 잠시나마 긴장한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봉합이 끝나고 그는 내가 듣고 싶은 모든 말을 해 줬다. ‘괜찮을 거다. 비행기 타셔도 된다.’ 사적인 대화도 나눴다.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안다. 액티브한 에너지가 매력적인 나라다. 한번은 꼭 가보고 싶다.’

응급실을 나오며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우려가 다 쓸데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의사의 외모와 냄새가 그의 나쁜 인상을 결정했다. 하지만 내가 신뢰 안 한 그 의사는 알고 보니 믿을 만한 자였고, 외국인이라고 대충 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간호사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위중을 판단하고 자기 할 일을 했을 것이다. 낫고 안심하고 나니 불신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왔을까. 낯선 곳에서의 방어기제 아니었을까. 아무리 내게 변명거리를 주려 해도 부끄러워진다. 환자가 되면 약해지고, 낯선 곳에 오면 당황스럽고, 말도 안 통하면 두려워진다. 약자가 되어보니 오히려 치료자를 믿기 어렵더라. 치료자가 보듬으니 감동하더라. 이 정도가 짧았던 파리 응급실 여행에서 얻어가는 교훈이랄까.

내 진료의 현장에도 나 같은 환자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많을 수도 있다. 병원의 수 많은 노인 환자들. 귀가 어둡고 말귀 못 알아들어 늙은 자신을 자책할 수 있다. 증상을 호소하는데 다들 잘 못 알아들으니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여길 수도 있다. 젊다 못해 어린 치료자의 억압적 태도에 좌절할지도 모른다. 의료는 발전해서 복잡하고, 극도로 세분화되어 겉도는 여행자가 된 기분일 수도 있다.

응급실을 나와 귀가하는 밤길은 오렌지 빛 안도감으로 가득했다. 내일이 귀국이지만 벌써 한국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귤 좋아하는 그 분이 만들어 준 길이었다. 좋은 치료자를 만나 아내와 나는 좋은 귀가길을 걸었다.

메르시(Merci), 닥터 암마르! 좋은 여행이었어요.

갑자기 떠오른 느낌으로 가볍게 썼고 글을 읽은 아내가 좋아하길래 ‘에이 모르겠다’식으로 내 버린 글이었습니다.

제출하고 나니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응모조건이 ‘의사가 자신이 진료했던 환자를 소재로 쓴 수필’인데 ‘의사가 자신이 환자로 진료받은 소재’로 슬쩍 바꿔 썼으니 든 가책이랄까요. 그럼에도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을 신문에서 보니 부끄럽기도 합니다. 본 수상을 계기로 진료와 관련한 글을 써 보고 싶어졌습니다. 상은 ‘더 잘 써 봐라'라는 의미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를 지지해주시는 제 가족, 특히 많은 것을 인내하고 같이 하는 아내와 수상의 기쁨을 같이 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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