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병원 사망사건 이후 수십건 대리처방 민원 제기…대전협 “익명 신고체계 갖춰져야”

가천대 길병원 전공의가 최대 59시간까지 연속수련을 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수련병원들이 전공의에 연속수련을 시키고도 적발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전자의무기록(EMR) 접속 차단에 있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14일 서울역 대회의실에서 ‘병원 내 수련환경 개선 촉구 및 전공의 사망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이같은 사실을 폭로했다.

대전협에 따르면 전국의 많은 수련병원들이 전공의들에게 과도한 장시간 근무를 시키고 있지만 EMR 접속을 차단하는 등의 편법으로 교묘히 법망을 피해가고 있었다.

길병원 전공의 사망 이후 협회로 하루에도 수십 건의 관련 민원이 접수되고 있는데 EMR 접속 차단이 확인된 병원만 9개 이상이라는 것이 대전협의 지적이다.

이날 공개된 곳만 서울 P병원, 서울 C병원, 부산 P병원, 부산 H병원, 대전 C병원, 대구 B병원, 대구 C병원, 경남 K병원, 충남 D병원 등이었다.

병원들이 직접 대리처방 지시를 내리지는 않지만 전공의들로 하여금 불법행위를 할 수밖에 없도록 종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정해진 근무시간 외 추가 근무를 해야할 경우 타 전공의, 담당 스텝(교수)의 아이디로 처방 및 기록을 하고 있었다.

대전협 이승우 회장은 “하루에도 수십 건 ‘나는 아직 근무 중이고 퇴근하지 못했으나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를 이용해서 (처방 등 일을) 하라고 한다’는 등의 제보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협 정용욱 수석부회장도 “2~3일 내 긴급하게 조사를 한 결과, 국립, 사립, 규모를 가리지 않고 사전에 등록해 놓은 시간 외 근무시간에는 EMR 접속을 막아 놓은 곳이 꽤 있었다”며 “이들 병원은 직접 (대리처방)하라고 하지는 않지만 ‘그럼 주80시간 안에 일을 마무리했어야지’라며 대리처방을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리처방은 의료법 위반 소지가 있으며, 응급 상황에 대한 책임소재 문제에도 영향을 준다고 했다.

이승우 회장은 “응급상황에서는 그 행위를 한 의사가 처방하고 이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리처방은) 의료법 위반 소지가 있고 이를 종용받은 전공의는 자괴감을 느끼지만 환자를 진료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대리처방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사망사건이 벌어진 길병원의 경우 오버타임 시 EMR 접속을 차단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 덕분에 대전협은 사망한 전공의 신 씨가 주 평균 110시간, 최대연속해서 59시간까지 근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신 전공의의 근무 시간이 아니라고 기록된 시간에 버젓이 처방내역이 존재하는 등 오버타임 사실이 확인됐다.

이 회장은 “길병원에서는 EMR 접속 차단을 하지 않고 있어 많게는 120시간씩 초과근무를 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전공의 사망 사건이 발생한) 길병원이 2018 전공의 수련병원평가에서는 상위권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즉 현장의 실상과 달리 평가에서는 (전공의법을) 준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라며 "한 두개의 병원이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병원이 ‘이렇게(대리처방) 하니까 안걸려’라는 마음으로 편법을 자행할까 두렵다”고 토로했다.

그렇기에 이런 대리처방 등의 편법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대전협의 이름으로 복지부에 관련 사항을 즉각 신고할 수 있는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복지부가 수련환경평가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전공의법 위반 사항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이 회장은 “지금 접수되는 민원이나 제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를 설득해 국민신문고에 신고하도록 하는 것이 전부다. 실명으로 신고하도록 돼 있다”며 “개선이 되려면 대전협에 접수되는 제보를 익명으로 복지부에 신고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수련환경평가 시) 전수조사가 힘들다면 무작위로 (조사대상 병원을) 추출해서라도 해야 한다‘며 ”실질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전공의법이 마련, 시행되고 있으나 실질적인 변화는 더디게 일어난다.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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