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 인정…형법‧모자보건법 등 관련 법 손질 이어질 듯
의협, 실효성 있는 개선입법 촉구…산부인과 “낙태 관련 행정처분규칙 폐기해야”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한 여성이나 이를 시행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헌법에 불합치하다고 선고한 것을 두고 그 배경과 향후 변화에 대해 의료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11일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죄)과 제270조 제1항에서 의사 관련 내용(의사낙태죄)을 헌법불합치로 판단했다.

헌법불합치는 해당 법률이 사실상 위헌이기는 하지만 즉각적인 무효화에 따르는 법의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을 개정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그 법을 존속시키는 결정이다.

헌재 재판관 9명 중 유남석, 서기석, 이선애, 이영진 재판관이 헌법불합치 의견을 냈으며, 이석태, 이은애, 김기영 재판관이 단순위헌 의견을 제시했다. 즉 단순위헌 의견에 헌법불합치 의견을 합산해 심판정족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자기낙태죄 조항은 모자보건법이 정한 일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임신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든 낙태를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하도록 정함으로써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유지·출산을 강제하고 있으므로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해당 조항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대하여만 일반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하므로 법익균형성의 원칙에도 어긋나 보인다”고 했다.

의사낙태죄와 관련해선 “자기낙태죄 조항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헌법에 위반되므로 동일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임신한 여성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를 하게 한 의사를 처벌하는 조항도 같은 이유에서 위헌”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자기낙태죄 조항과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해 각각 단순위헌을 결정할 경우 임신 기간 전체에 걸쳐 행해진 모든 낙태를 처벌할 수 없게 됨으로써 용인하기 어려운 법적 공백이 생기게 된다”면서 “이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하되 입법자의 개선입법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 적용을 명하는 게 타당하다”고 했다.

이에 정부와 국회는 늦어도 2020년 12월 31일까지 개선입법을 이행해야 한다.

따라서 내년말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시기, 즉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을 임신 22주까지로 볼 것인지, 여성이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충분히 시간을 어떻게 정할지 ▲결정가능시간과 사회적·경제적 사유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합할지 ▲상담요건이나 숙려기관 등과 같은 일정한 절차적 요건을 추가할 것인지, 낙태 시술에 대한 건강보험을 적용할지 여부 등에 대한 입법이 이뤄지게 된다.

그때까지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 낙태죄에 대한 형사처벌 조항은 효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의료계 “조속한 후속 조치 필요…회원 피해 없어야”

한편, 헌재의 이같은 헌법불합치 판결에 시민사회단체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헌재의 결정이 나오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공동행동은 “이번 헌재 결정은 경제개발과 인구 관리를 위해 생명을 선별하고 여성을 통제·대상화해 그 책임을 전가해온 지난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중대한 결정”이라며 “사회 모든 구성원의 재생산권이 보장될 수 있는 사회로 나가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나서야 한다. 여성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는 성평등 사회, 모든 이들이 삶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위)헌재 선고 전 낙태죄 폐지 반대 집회 모습, 낙태죄 폐지 찬성 단체 기자회견(아래)

반면 낙태죄 존속을 주장해 온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은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유감을 표한다”면서 “헌재의 결정은 생명을 보호하는 헌법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판단이다. 낙태를 하면 아기가 죽는다는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성토했다.

정치권은 헌재 결정을 존중하며, 관련 법안을 조속히 재정비 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헌법재판관들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을 존중한다”면서 “국회는 법적 공백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속히 형법, 모자보건법 등 관련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헌재의 결정은 시대변화와 사회 각계의 요구들을 검토해 고심 끝에 내린 것”이라며 “이제 낙태에 관한 입법을 재정비해야 하는 책임이 국회에 주어졌다”고 피력했다.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행복추구권 등의 관점에서 진일보한 판단”이라며 “헌재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민주평화당 박주현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낙태죄가 만들어진 지 66년 만에 이뤄진 헌법불합치 판결을 환영한다면서 “(헌재 판결은)낙태에 가하는 사법적 단죄를 멈추라는 요구로, 타당하다”고 평했다.

정의당 최석 대변인은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은 국가 여성의 신체를 출산의 도구로 간주하고 멋대로 옭아매던 매우 전근대적인 법률”이라며 “이번 헌재 결정으로 오랫동안 지연된 정의가 이제야 이뤄지게 됐다”고 환영했다.

하지만 “이 법은 2020년 12월 31일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면서 “국회는 하루라도 서둘러 관련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의료계는 헌재 판결로 진행될 개선입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의사협회 박종혁 대변인은 “낙태죄 처벌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헌재가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생각한다”면서 “이제는 신속한 후속 조치가 따라야한다. 정부와 국회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실효성 있는 개선입법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박 대변인은 이어 “그간 낙태죄 처벌조항으로 피해를 본 의사회원들이 많았다”면서 “협회는 개선입법 과정이나 그 이후에도 회원들에게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직선제)대한산부인과의사회도 “정부와 국회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소원 결과에 따라 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더 이상의 사회적 분열과 혼란을 종식시켜주길 바란다”면서 “정부는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발생할 수 있는 국민들의 불편함과 진료실에서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확한 지침을 제시해 혼란 발생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의사가 낙태하게 한 경우’를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해 자격정지 1개월 처분을 부과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의 즉각적 폐기 ▲법 개정 이전까지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사유와 불가사유를 명확한 규정 ▲의사 개인 신념에 따라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진료거부권 인정 ▲낙태와 출산, 양육에 대해 남성에도 책임 부과 등을 촉구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산부인과 의사는 환자 및 임산부의 치료자로서 여성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헌재의 이번 판결이 단순위헌 결정이 아닌 건 아쉽지만 그나마 잘된 결정”이라며 “우리는 태아 생명권을 존중해 중절수술을 원할 경우 임산부와 숙고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또 “회원들에 대한 윤리의식 고취와 교육을 진행할 것이며 현재 실시하고 있는 청소년, 일반대상 성교육과 피임교육도 지속적으로 시행하겠다”면서 “개선입법에도 전문가단체로서의 의견을 명확히 전달하겠다”고 했다.

헌재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리며 입법자에 대한 재량권을 인정한 만큼 앞으로 진행될 개선입법 과정에서 치열한 논의가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해당 조항을 삭제하고 관련 규정을 개정하는 부분도 쉽진 않겠지만 모자보건법에서 규정한 예외적 허용사유 등을 확대해 위헌적 요소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된다면 자칫 헌재가 제시한 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단순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이 ‘임신 제1삼분기’에는 어떠한 사유를 요구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숙과 판단 아래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피력한 만큼 그 기한을 정하는 문제도 많은 사회적 논의와 충돌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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