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대 박종훈 교수

우리나라 의료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할까? 나는 단연코 ‘무계획의 의료’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기억하는 지난 20년간 나는 큰 틀에서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비전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나마 노상 들은 소리는 공공의료 확충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말만 믿고 살았더라면 어찌했을까 싶다.

지금도 우리나라 의료가 지향하는 의료시스템이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계획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10년 후 우리 의료는 어떤 모습일까? 2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장기적인 계획이 있어야 의과대학, 간호대학, 약학대학의 신입생 정원부터 교육과정 계획이 설 것이고 수련과정도 조정이 될 터인데 아무것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선진국 흉내를 내니 시장은 매번 혼란스럽다. 그 때마다 변형된, 지속가능하지도 않은 안들로 위기를 모면하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선택진료제 폐지, 문재인 케어 도입, 전공의 특별법, 주 52시간 근무 등의 경우 시장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알만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처하기 위한 논의도, 계획도 준비한 적이 없다. 그래놓고서는 이제 와서 대형병원 쏠림 현상 심화와 의료 인력의 절대적 부족에 대해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이라도 보는 듯 허둥대고 있다.

그러는 사이 현장은 뾰족한 해결책도 없이 의료법 위반을 넘나들면서 각 기관이 알아서 버티고 있다. 걸리면 범죄고 안 걸리면 다행이다.

전공의 주 72시간 근무에 대해서는 어떤 준비를 했나? 물론 수년간의 준비와 계도 기간이 있었지만 전공의 수급에 맞게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을 통한 수련병원의 병상수 조정이 있었나? 이를 대체할 만한 입원전담의 제도나 소위 말하는 PA제도의 근본적인 대책이 현실성 있게 수립되었던가? 대형병원 쏠림 현상을 차단할 만한 구제적인 계획은 있었나? 정부 스스로 쓰나미 사태를 조장하고도 방파제도, 전문인력도, 시스템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보기 좋게 수문 열어보라는 정권의 주문에 대책 없이 열어젖혔으니 시스템의 붕괴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현상은 필수적으로 공간과 인력에 대한 투자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이는 의료비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의료 인력 대란으로 치닫고 있다. 중증과 경증이 구별 없이 환자들이 밀려들다 보니 증가되는 관리비보다 의료 수익의 저하로 인해 대형병원의 수익률은 낮아 질 것이고–이미 낮아졌다는 보고들이 있다-이는 분명 의료 인력의 급격한 불균형과 과잉진료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결국 정부는 정부대로 폭증하는 재원의 한계에 직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현행 행위별 수가제도를 전면적으로 폐기하고 DRG제도로 가거나 총액계약제로 갈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충격이 지나고 난 후 우리 의료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늘 그렇듯이 그 때도 장기적인 계획은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일전에 어떤 자리에서 공공의료 확충을 주장하는 분을 만나 한 말이 있다. “공공의료를 근간으로 하려면 최소한 30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대생 선발부터 졸업 후 교육과정 전반의 준비가 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말에 그 분은 매우 놀랐다고 한다. 처음 듣는 소리라고. 그냥 공공병원 확충하면 되는 것인 줄 알았다고.

이런 식이다. 무계획이 낳은 혼란의 시대가 이제 좀 나아져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이 나라 의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정처 없이 떠내려갈까?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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