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와 임종기 구분했지만 환자의 자기결정권 침해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석희태 교수 "의사를 기준에 속박해서는 안돼…양심에 따라 독립 진료할 수 있어야"

의사 A씨는 지난 1월 10년 정도 근무했던 요양병원을 떠났다. 스스로를 인간 존엄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며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왔지만 폐렴에서 패혈증으로 악화된 환자들이 항생제마저 듣지 않아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괴감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연명의료법에 명시된 것처럼 사망에 임박한 상태가 아닌 경우 영양공급 등 중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정맥 주사를 놓거나, 혈관이 많이 부은 상태라면 코 줄을 묶어서라도 영양공급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A씨는 그 과정을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환자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연명의료법이 오히려 환자의 기본법을 침해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A씨는 의학발전과 의료집착 현상으로 인해 살아 있음을 강요당하고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는 환자들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며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연명의료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연명의료결정법 시행된 지 1년 6개월 만에 5만4,000명의 환자가 연명의료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처럼 의료 현장에 있는 의사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이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됐지만 오히려 환자들의 자기결정권과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광복관에서 열린 대한의료법학회 ‘8월 학술발표회’에 참석한 의사들은 연명의료법이 의료 현실을 담지 못해 발생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다.

이날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규에서의 쟁점 비교’를 주제로 발제에 나선 연세대 의료법윤리학과 석희태 교수는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로 연명의료 중단을 허용토록 하는 범위 자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라며 이를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에서는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할 수 없는,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임종과정’으로 보고 연명의료 중단의 근거로 명시했다.

연명의료 중단결정 이행 시 통증완화를 위한 의료행위와 영양분 공급, 물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같은 조항들로 인해 존엄한 임종을 위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박탈되고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모순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석 교수는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환자가 사전에 연명의료 중단 의견을 밝혔다고 하더라도 임종에 이르렀을 때도 절대 (연명의료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며 “최후 단계를 나타내기 위해 '임종과정'이라는 표현이 도입됐지만 이마저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환자의 의향과 의학적 상황 사이에서 고뇌하는 의사를 갖가지 자세한 (현행법) 기준에 속박해서는 안 된다"며 "의사는 의학원칙과 환자의 의사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진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연명 의료 중단과 관련해 환자 가족 범위를 제한하거나 담당 의사를 중심으로 의료팀이 결정하되 필요한 경우 적기에 자문할 수 있는 전문적인 조직을 상설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석 교수는 “결정 능력이 없는 환자를 대리할 가족이 없는 경우 담당 의사를 중심으로 의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거나 의료기관별 혹은 지역 내 윤리위원회 등 설치를 통해 상시적으로 의견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명의료법에 따르면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고 환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의학적 상태인 경우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로 연명의료중단 등에 대한 결정을 하고 담당의사 및 해당분야 전문의 1명이 확인하도록 명시돼 있다.

그러다보니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직접적인 의사표현 보다는 가족의 합의와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체 연명의료 중단·유보 환자의 67.1%가 이 경우에 해당했다.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경우는 1만8,775명(34.8%), 환자 가족 2명 이상의 일치된 진술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경우는 1만7,387명(32.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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