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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병리 슬라이드’는 창고에서 컴퓨터로 나올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19.11.04  12: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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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 물결 타고 ‘디지털병리’ 수면 위로…병원 곳곳에 수백만장씩 보관
주요 대형병원 중심으로 디지털화 가속…병리검사료 가산 등 수가개발 절실

“병리학자들은 주변에 빈 공간이 없으면 불안해요.”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 병리학과 전문의의 말이다. 불안함의 이유는 해마다 수십만장씩 쌓이는 ‘병리 슬라이드’를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사용한 병리 슬라이드를 폐기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병원에서 병리 슬라이드 보관은 통상적으로 의무기록 등과 동일하게 5년이 지나면 폐기해도 된다. 법적으로는 별도 (보관의무)규정이 없다. 하지만 병원들은 여러 이유로 슬라이드를 버리지 못한다.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는 암 등 중증질환 특성상 환자 병리 슬라이드를 버리지 않고 보관해야 환자 이력을 철저히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의 관리 편의 보다는 환자 안전을 우선시한 결정이다.

서울아산병원 내 병리 슬라이드 보관 창고 모습.

전국에서 암환자가 가장 많이 몰리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암 등 중증질환 진단을 위해 한해 만들어지는 병리 슬라이드는 90여만장이다. 만들어진 슬라이드는 진단이 끝난 후에도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병원 곳곳 창고에 쌓이게 된다.

서울아산병원은 1989년 개원 이래 지금까지 만든 병리 슬라이드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 해마다 몇십만장씩 쌓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몇장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 아직은 원내 곳곳에 창고를 만들어 보관 중이지만 더 이상 만들어낼 공간이 없다.

장소가 협소하기로 유명한 서울대병원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대병원은 한해 약 20만장의 병리 슬라이드를 만들고 있는데, 역시 개원 이래 만든 병리 슬라이드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병원 내 공간이 협소해 병원은 물론 경상북도 문경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연수원에도 별도 공간을 만들어 오래된 슬라이드를 보관 중이다.

문경에 있는 병리 슬라이드가 필요한 경우 문경 직원이 서울로 직접 슬라이드를 가지고 올라온다. 그러다보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번거롭다. 참다 못한 서울대병원은 2년 전부터 슬라이드를 디지털화하고 있다.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를 위한 스캐너를 2대 구입해 운용 중이며, 4대를 더 구입해 서울대병원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병리 슬라이드를 내년 초까지 모두 디지털화 하겠다는 게 서울대병원의 목표다.

하지만 병리 슬라이드의 디지털화는 단순히 스캐너를 구입해 운용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디지털화된 정보를 읽을 수 있는 컴퓨터, 모니터, 소프트웨어, 저장 서버 등을 모두 마련해야 한다.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스캐너 한 대 가격만 해도 억대이며 디지털화한 자료를 보관하는 서버비도 만만치 않다.

당연히 병원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병리과에 몇억 단위 돈을 투자할 수 있는 병원도 전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다. 따라서 병리학계에서는 정부가 나서기를 원하고 있다.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를 위해 수가신설이 불가피하다는 게 병리학계의 지적이다.

사실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에 따른 수가개발은 정부 또한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실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첫 시작은 ‘인공지능’ 활용한 진단수가 개발

이에 대한병리학회는 올해 5월 보건복지부로부터 ‘인공지능 관련 수가 가이드라인 연구’를 위탁해 진행해 왔다. 이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진단할 경우 수가를 어떻게 줘야 하는지 연구한 것으로, 영상의학과에서도 인공지능 수가 연구에 참여해왔다.

하지만 영상의학과와 달리 병리과의 경우 한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병리과의 경우 영상의학과는 다르게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가 안돼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활용한 진단 자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연구를 수행한 서울의대 병리학과 이경분 교수는 “최근 학계에서 불고 있는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와 관련한 수가 개발 움직임은 사실 복지부의 인공지능 활용 계획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가 이슈화된 것이 불과 2~3년 전이다. 지금은 병리 슬라이드가 디지털화가 안돼 인공지능이 분석할 파일이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결국 지금은 인공지능이 분석할 파일도 없는데 인공지능 진단 수가부터 이야기 하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를 위해 서울대병원이 운용 중인 스캐너.

자체 재원 활용한 서울대병원의 디지털화 2년

이경분 교수가 중심이 된 서울대병원 병리과는 2년 전부터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에 착수했다. 현재 원내 2대의 스캐너를 보유 중이며, 스캐너 한대 당 한번에 400장의 병리 슬라이드를 디지털화한다. 서울대병원의 당초 목표는 스캐너 2대로 하루에 만들어지는 약 700여장의 슬라이드 모두를 디지털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캐너가 병리 슬라이드를 400장을 디지털화하는데 하루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때문에 서울대병원은 현재 소화기내과, 간담췌 분야, 산부인과, 비뇨기과, 신장내과, 피부과 등에서 만들어지는 병리 슬라이드는 우선 디지털화한 후 진단에 들어가고, 나머지 분야의 경우 해당 진료과 의사가 원할 경우 디지털화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투트랙 전략을 통해 서울대병원은 스캐너를 늘려 모든 병리 슬라이드를 디지털화하는 것이 원하는 슬라이드만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4대의 스캐너를 더 구입해 내년부터는 서울대병원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슬라이드를 디지털화할 계획이다.

서울대병원 병리과 이경분 교수가 디지털화된 병리 슬라이드로 진단하는 모습.

이 교수는 “2년 간의 디지털화 작업으로 임상의사들의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 요구도가 높아졌다. 향후 디지털 정보 관리 측 등을 생각하면 선별적으로 디지털화하는 것보다 만들어지는 모든 슬라이드를 디지털화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병원은 (다른 병원에 비해서도) 창고 상황이 좋지 않다. 때문에 경영진에서 더 적극적으로 움직인 측면도 있다”며 “서울대병원의 디지털화가 모든 병원에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디지털화를 위해 스캐너 구입, 모니터 세팅, 컴퓨터 세팅,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세팅 등을 모두 각각 했는데 지금은 모든 장비가 통으로 세팅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병리학계가 원하는 수가 모형은?

대한병리학회 장세진 이사장.

병리학회 장세진 이사장(서울아산병원 병리학과)은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한다.

병원들의 슬라이드 보관 장소 마련이 점점 어려워지고 병원 내 모든 시스템이 전산화되는 과정에서 어느 분야보다 디지털화가 필요한 병리분야를 모른척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장 이사장은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는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다. 지금처럼 슬라이드를 직접 들고 이리저리 다니는 것 자체가 손상 위험성을 높인다”며 “슬라이드를 디지털화하면 필요한 때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장 이사장은 “문제는 병리 슬라이드에 대한 국민 이해도가 낮은 상황에서 디지털화에 대한 관심도 당연히 낮다는 것”이라며 “슬라이드 디지털화는 병원에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환자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병리학계에서 바라고 있는 수가 모형은 현재 1만3,000원 정도인 병리검사료에 가산을 하는 방식이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장 이사장은 10~20% 가산 정도면 의료기관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병리검사료 가산 외 디지털화 장비를 갖춘 후 실제 병리 슬라이드를 디지털화했을 때 별도 수가를 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각 병원마다 병리 슬라이드를 만다는 양과 보관할 수 있는 여유 공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수가에 대한 입장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영상의학분야 디지털화와는 다른 병리 디지털화

디지털화된 병리 슬라이드 화면.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장 이사장은 영상의학과는 다른 병리학회 상황을 언급하기도 했다.

수십년전 필름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할 때는 모두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비싼 값으로 필름을 계속 사용하는 것 보다는 디지털화하는 것이 금전적으로 이득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디지털화가 필름 인화과정에서 나오는 유해물질도 없애줬다.

하지만 병리는 아니다. 병리 슬라이드를 만드는 비용이 필름 값만큼 비싸지 않고 디지털화를 전면 도입한다고 해서 유리로 된 슬라이드를 안만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만든 후 보관기간이 줄어들 뿐이다.

전국 병원마다 상황이 다르다는 것도 걸림돌이다. 서울 시내 대형병원들은 더 이상 병리 슬라이드를 보관할 장소가 없어 디지털화가 꼭 필요한 상황이지만 지방 대학병원이나 중소병원들의 사정은 또 다르다.

때문에 병리학계 내에서도 전면 디지털화를 주장하는 목소리와 환자 등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만 디지털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이런 주장들은 디지털화 수가 모형 개발의 다양한 목소리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장 이사장은 여러 난관이 있지만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는 꼭 가야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장 이사장은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는 이를 통해 병원이 이득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환자안전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라며 “최근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의료빅데이터 확보를 위해서도 슬라이드 디지털화는 중요하다. 의료 빅데이터에 진단을 위한 슬라이드 기록이 빠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라고 말했다.

장 이사장은 “서울아산병원이 디지털화를 준비하면서 추계했을 때 초기 투자비용이 약 100억원 정도”라며 “병원에서 이정도 투자를 하면 유지보수와 관련해서는 정부에서도 수가를 통해 지원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해 의료비로 60조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환자안전을 위해 몇백억 정도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복지부 “방향에 공감, 결정된 내용은 없다”

병리학계 내에서는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와 관련한 수가 마련을 기정사실화한 분위기지만 실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복지부 입장은 좀 다르다.

병리학계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가야할 길은 맞지만 아직 검토된 내용은 없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복지부 보험급여과 이중규 과장은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필요한 방향이라고 본다”며 “다만 (벌써부터 수가 관련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은데) 아직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 수가와 관련해 진행된 내용이 없다. 병리학회에서 의견을 줘서 검토하겠다고 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과장은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은 동의하지만 그 일에 건강보험 재원을 연결하는 것은 다른 문제기 때문에 검토해보겠다고 한 것”이라며 “방향은 동의하지만 (병리 슬라이드 디지털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건보 재정을 사용해야 하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과장은 “영상의학 분야 때 디지털화를 보면 결국 (모든 의료기관이) 디지털화하게 될 것으로 본다. 시간문제”라며 “이를 가속화하기 위해 건보에서 얼마나 개입할지는 알 수 없다. 세상이 변하는 것과 변하는 세상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별개 문제”라고 언급했다.

곽성순 기자 kss@docdocdoc.co.kr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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