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대전협 공동기획] 젊은 의사가 말하는 ‘한국의료의 민낯’②
부산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단 받았지만 치료 거부하고 서울대병원행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국민들의 의료접근성은 높아졌다. 하지만 왜곡된 의료전달체계, 저수가 구조 등 고질적인 문제들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의료 현장에서는 그로 인한 부작용을 호소한다. 전공의들은 그 부작용을 최전선에서 체험한다. 그들은 환자들의 의료 이용량은 늘고 있지만 과연 최선의 진료를 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에 청년의사는 대한전공의협의회와 함께 한국의료의 실상을 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 A씨는 최근 응급실에 온 급성심근경색 환자 때문에 아연실색했다. 걸어서 응급실에 들어선 그는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서울에 있다가 흉통을 느껴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찾은 게 아니었다. 부산 한 대학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진단을 받고 KTX를 타고 올라왔다고 했다.

심근경색은 조기 진단과 치료가 중요한 질환이다.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시술을 최대한 빨리 시행해야 한다. 증상이 발현된 후 1시간 이내 시술하면 사망률을 50% 이상 낮출 수 있으며 시술이 늦어질수록 시간당 0.5~1.0%씩 사망률이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환자는 급성심근경색으로 진단을 받은 지 3시간 정도 지났으며 증상은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게다가 70대인 고령 환자였다. 그는 진단을 받은 대학병원에서 시술 받기를 거부했다. 그곳 의료진도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처음 찾은 대학병원도 상급종합병원이다.

그렇게 그는 직접 KTX를 타고 서울로 출발했으며 2시간 30여분 뒤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후 다시 택시를 타고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A씨는 “검사를 해보니 혈관이 꽉 막혀 있었다. 부산에서 KTX를 타고 왔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며 “환자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KTX 안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 환자는 무사히 시술을 받고 퇴원했다. 하지만 A씨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고 했다.

A씨는 “그 환자는 천운이었다. 무사히 시술을 받고 살았지만 정말 위험했다. 처음 진단을 받았던 병원에서 시술을 받는 게 맞다”며 “심근경색은 대학병원별로 의료의 질 차이가 크지 않다. 가까운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도 있지만 A씨는 서울대병원 응급실이 보여주는 ‘한국의료의 현실’이라고 했다.

서울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모습

입원하거나 외래 예약 위해 응급실 찾는 ‘비응급’ 환자들

서울대병원 응급실은 권역응급의료센터로 과밀화가 높은 곳이다.

지난 7월 공개된 ‘2018년 응급의료기관 평가’ 결과, 서울대병원 응급실은 B등급을 받았다. 응급실 과밀화 정도를 보여주는 병상포화지수는 2등급이었다. 2등급은 병상포화지수가 80% 이상이거나 100% 이상이면서 전년 대비 20%p 감소한 경우 받는 등급이다. 병상포화지수가 100%면 병상이 모두 찼다는 의미다.

서울대병원 응급실은 전국에서 가장 붐비는 곳으로 병상포화지수를 평가하기 시작한 2013년부터 4년 동안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016년 응급의료기관 평가에서 서울대병원 응급실 병상포화지수는 165.5%였으며 중증환자 재실 시간도 19.2시간으로 가장 길었다.

누울 병상이 없고 중증환자도 19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지만 환자들은 지금도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몰린다. 그리고 상당수가 외래 진료 예약을 위한 통로로 응급실을 이용한다.

A씨는 “서울대병원 응급실 과밀화가 너무 심각해서 트리아지(triage, 환자 분류)도 하기 힘들다. 전국에서 온다. 환자가 많을 때는 응급의학과 의사 1명당 30명 이상 데리고 있기도 한다”며 “1시간 동안 응급실에 100명 이상이 체류할 때도 있다. 응급실에 병상이 30개 정도 밖에 없어서 70명은 앉아 있거나 서서 대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 중 상당수가 암 환자다. 응급한 상황이 아닌데도 외래 진료를 받기 위해 응급실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며 “서울대병원 외래 진료 예약을 하면 6개월 이상 대기해야 하는데 응급실을 통하면 조금 더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환자들은 최상의 진료를 받기 위해 서울대병원을 찾지만 과연 최상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인지 모르겠다”며 “응급실이 제 역할을 하려면 문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응급의료센터 '2018년 응급의료기관 평가 결과'

이는 서울대병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울대병원과 함께 빅5병원으로 꼽히는 나머지 병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2018년 응급의료기관 평가에서 삼성서울병원과 서울성모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지역응급의료센터)은 모두 B등급을 받았다.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의 경우 병상포화지수는 1등급이었지만 중증환자 재실시간은 4등급(7시간 초과)이었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은 병상포화지수 2등급, 중증환자 재실시간 4등급이며 세브란스병원은 병상포화지수 3등급, 중증환자 재실시간 4등급이다.

병상은 모두 찼고 중증환자도 7시간을 초과해서 응급실에 머물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빅5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응급실을 찾는 ‘응급 아닌 환자’는 지금도 많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빅5병원인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공의 B씨는 “일단 환자가 응급실에 들어오면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 그리고 한꺼번에 너무 환자가 몰려오다보니까 중증도 파악도 하기 힘들다”며 “메르스 사태 이후 응급실 체류시간을 제한하는 규정들이 생겼지만 환자가 몰리는 대형병원은 지키기 힘들다. 때문에 중증 환자의 상병코드를 경증으로 바꿔 체류 시간을 늘리는 일도 다반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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