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구로병원 신경과 김예은 전공의

당직 없는 주말이면 종종 서점에 들른다. 계획 없이라도 일단 들어서면, 책들에 둘러싸이는 것만으로도 한 주간의 긴장이 풀리는 곳. 시와 에세이 공간으로는 마음부터 먼저 뛰어간다. 그러다 마음 끌린 시집 한 권이라도 품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날 저녁은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맘껏 말랑해질 준비가 된다.

내게 말랑해진다는 건, 잔잔한 감정의 호수에 일부러 돌 몇 개를 던져 어지르는 일이다. 그 돌은 주로 시와 맥주, 어떤 때는 홍대 싱어송라이터의 차분한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나 편하라고 제 무게만큼 가라앉아 숨죽이고 있는 감정들을 굳이 한 번씩 띄우는 일. 이 요상한 습관은 내가 의사가 된 후부터 생긴 것이다. 감정을 띄워 올리는 날이면, 그동안 조용히 눌려있던 사람들이 기억들과 풀려나오고 가끔씩은 눈이 붓도록 울게도 된다.

황금 같은 휴식 중에 이런 요란한 감정소모라니! 왜 피곤하게 사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사실 내 피곤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렇게 무사한 감정들을 확인하며 풀리곤 한다. 의사가 되어보니 치료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치료만이 아니라 환자들과 함께 삶과 죽음 이 극단의 환경을 함께 오가는 일이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그 안에서 떠오르는 감정들을 무심코 눌러대는 내 손가락들을 인지하게 되었다. 일상이란 나 편할 만큼 감정들을 누르고 띄워내는 건반 연주처럼 흐르고 있었고, 바쁠수록 쉬운 건 소리 나게 누르기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열 손가락이 모두 누르는 순간부터는 연주가 곧 멈출 것이다. 내게 말랑해지는 주말이란, 손가락 힘을 풀고 감정을 마음껏 띄워내며 다시 흐르는 연주를 듣는 여유인 셈이다.

이렇게 변명 같은 설명을 한다한들 여전히 나는 복잡한 사람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내 마음은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던 시작부터 꽤 요란스러웠다.
“어떤 의사가 되고 싶어요?”

매번 정석이고 뻔한 대답을 했던 이 질문 앞에 속으로 늘 첫 번째 답은 감정적으로 무뎌지지 않는 의사가 되자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무뎌지지 않을 수 있는’. 나는 시작부터 그게 자신이 없어서 내 마음을 다그쳤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의사가 되고 싶은데, 너는 과연 고통과 죽음이라는 것의 무게는 제대로 알며 마주할 용기는 있는 것이냐고.

회사원인 친구들이 매일 서류를 마주하듯이 내겐 환자들을 마주하는 것이 일상이 될 테고, 그들의 깊지만 무형한 고통은 보호자들 표정까지 빌려야할지 모른다. 매번 그것들을 마주하며 이해하기란 너무 괴로울 것이고 괴로운 만큼 나는 빠르게 적응해나가겠지. 그러다 어느 날엔가 삶과 죽음에 통달한 전문가처럼 그것들을 익숙하게 넘기고 있지 않을까. 그런 내 모습을 떠올려보자니 썩 달갑지가 않았다. 생명을 다루는 부담감 앞에 평생 서야 한다면 너무 무겁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가벼워지는 것이 좀 더 두려운 시작이었다. 적응력이란 것도 타인들의 고통 앞에서 만큼은 때론 무력하기를 바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의사가 되고나니 밥과 잠부터 챙겨가며 진지했던 초심은 빠르게 무색해졌다. 책 한 권이라도 쓸 듯한 포부로 일기장을 사두었지만 현실은 의무기록을 채우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클릭 한 번으로 넘어가는 차트처럼 하루에도 열 명이 넘는 환자들이 나를 거쳐 병원으로 들어오고 나갔다.

그들 사이에서 한 번씩 잊고 싶지 않은 감정과 깨달음도 반짝였다. 하지만 그것을 가치 있는 글로 남기기에는 내 마음부터도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쉬는 날마다 왠지 마음이 가라앉아도 나는 안경다리를 올리듯이 무심코 넘겼다. 그렇게 슬쩍슬쩍 넘겨버리는 감정들이 가끔씩은 눈물로 터져 나오기도 했는데 그땐 이미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꺼내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가 이상한 낌새에 뒤적거리면 이미 끈적하게 다 녹아내려있는 초콜릿처럼.

그런 주치의로 반년을 보내던 무렵, 나는 언제든 무뎌진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약을 받게 되었다. 줄노트를 찢어 딱지 모양으로 접은 편지 두 장. 그것은 중환자실에서 3개월 넘게 사투를 벌이고 있던 환자의 아들이 내게 조심스럽게 건넨 것이었다. 지금은 편지의 모서리들이 꽤 닳아있는데, 내가 한 번 읽고 넣은 가방 안에서 다시 꺼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형용하기 어려운 마음으로 한참을 가지고만 다니다가 반년쯤 더 지나서였을까. 주말 어느 카페에선가 다시 펼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읽어 내리다가 주변 눈치 보기도 전에 눈물부터 떨어져 어찌나 당황했던지.

그 환자는 갑작스러운 의식저하로 아들과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60대 여자 분이었다. 진단은, 내릴 때부터 마음이 무거워지는 세균성뇌염. 매일 내원하던 보호자들과의 면담시간도 그렇게 무거웠고 그 와중에 받게 된 편지였다. 받을 때는 부담스럽고 난처했는데, 막상 열어보니 그 안에는 내게의 부탁이 아니라 아들의 진심어린 고민들로 가득 차있었다. 어떻게 해야 어머니 등의 불그스름한 욕창들이 조금이라도 덜 생길지, 어떻게 해야 덜 고통스러우실지. 내가 매일 그 환자의 콩팥, 염증 수치 등을 보며 약을 끊어야할지를 고민하던 동안, 어머니를 보는 아들의 눈에 제일 아프게 걸리는 것은 점점 커져가는 욕창이었던 것 같다. 잔뜩 달린 모니터들을 다 뗄 수만 있다면 집으로 모시고 가 밤새도록 몸을 뉘이고 닦아드리고픈 마음이라고 했다. 그날만큼은 내게도 환자의 혈액검사 수치나 폐사진보다 욕창이 더 커보였던 것 같다. 지금 그 때를 떠올리면, 환자와 아들의 얼굴은 모두 흐릿한데 환자 등의 붉던 잔상만큼은 아리게 남아있다. 그리고 함께 떠오르는 장면기억들이란 생각보다 구체적이었다. 조심스럽게 내게 허락을 받고는 어머니 귀에 이어폰을 꽂아 좋아하시던 음악을 들려주던 아들, 표정을 조금 지으시는 것 같지 않느냐며 묻던 모습들. 2개월이 넘어가도록 한결같은 아들의 모습을 보며 정말 기적이라는 게 와줄 순 없을까 바라보기도 했었다. 적어도 그들에게 일상 대화였을 어떤 흔한 말이 아닌, 제대로 된 작별인사라도 허락되면 안 될까.

아들의 눈에 아프게 걸리던 욕창은 그만큼 환자의 의식저하 상태가 길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기간 동안 매일 열심히 면담해드리는 것 외에 희망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던 내 마음에도 점점 무력감이 반복해 덮쳐왔다. 보호자분들은 끝까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믿어보고 싶어 하셨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환자의 혈액 이상 수치 하나하나를 열심히 교정해 나가며 호전 중인 결과를 설명하기도 했지만, 뒤돌아서면 점점 늘어가는 환자의 욕창과 터진 혈관들이 눈에 띄었다. 그 앞에서 태연한 척하던 내 마음의 등 어딘가에서도 감정들이 눌리고 눌려 불그스름한 상처로 남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의사가 되어 가장 견디기 버거운 감정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코 무력감이다. 편지를 읽다가 터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면서, 나는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아져온 게 아니라 불편한 감정들을 마음 한 구석에 쌓아두고 돌보지 않고 있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편지를 오래도록 꺼내지 않으며 넣어 다니기만 한 것도 그 기억의 무게에 대한 얕은 대처방식이었을 것이다.

두 장의 편지를 똑바로 다시 펼쳐 읽은 날부터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은 내 마음 속속들이 숨어있는 감정들을 마구 헤집고 싶었다. 그렇게 펼치다보니 이제는 내 초심이 어디쯤에서 지켜지고 있는지를 묻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내가 바라던 의사의 모습인지. 편지를 접고 실컷 울고 나니까 긴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건 ‘편지에 대한 1년 늦은 답장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의 나를 보면, 걱정했던 것처럼 ‘일에 적응한다’는 게 ‘감정적으로 무뎌진다’와 동의어는 아니었던 것 같다.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환자들의 고통은 매번 무겁고 매일 달랐다. 정확히 내가 무뎌져온 것은 환자들의 고통의 무게보다는,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마주하려 애쓰며 매일 내 마음이 감당해내고 있는 무게였다. 그것은 가끔 괜찮은 척 애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결 덜어질 수 있는 종류였는데 말이다.

오히려 일에 적응하며 효율이 오르니까, 잠만 자던 쉬는 날도 내 마음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하던 나는 감정의 배출구가 필요해지니 자연스레 서점을 찾고 있었다. 마음을 돌보면 평소 당연하게 넘겨온 것들도 조금씩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매일 주치의로서 만나온 사람들의 마음에 새삼스레 놀라기도, 그러면서 무거운 감사함이 든다. 한 명의 타인일 뿐인 내게 의사라는 이유로 자신의 몸과 삶을 맡겨온 마음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맡기며 의지해오는 마음들에 대해서.

대학병원에서는 흐트러지는 감정을 재빠르게 수습해야할 때가 많다. 실수 없이 일을 해결하는 건 감정보다는 이성이고, 모두가 불안해할 때에도 의사는 침착하게 이끌 수 있어야 한다.
한때는 사망선고를 내리고 유족들이 우는 환경 뒤에서 사망진단서를 작성하고 바로 다음 환자를 보러가는 내 모습이 기계 같아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그런 때마다 의사인 내 필요에 우선하여 불필요한 감정들이 잠시 침전하는 것이지, 그들에게 무뎌지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앞으로 좀 더 나를 믿어나가며 주저없이 많은 상황들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오늘도 적당한 날씨 하나로 세상은 평화롭고 많은 사람들은 별 탈 없어 보인다. 내가 가운을 벗고 병원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렇다. 인생이 언제든 갑자기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 느끼며 행복하기엔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 아닐까. 나는 불가피하게 삶의 유한성을 자주 목격할 것이고, 앞으로 무너지지 않는 마음을 가질 계획이 없다. 많이 웃고 많이 울자. 조금은 요란스러울지 몰라도 그게 내가 되고 싶었던 의사의 모습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는 길이리라 믿는다.

의사가 되고 나서 오랜만에 글 하나를 마무리 해보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병동과 응급실을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전공의 2년차이다보니, 두 달에 걸쳐 틈틈이 쌓아간 문장을 겨우 하나로 묶어냈습니다. 제가 의사 초년생인 만큼 내용도 깊이도 농익지 않은 글일 텐데 상을 주셔서 쑥스럽기도 하고, 더 깊고 성숙해져 갈 거라는 응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수많은 인생들을 간접경험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양 극단을 자주 바라보는 이 환경 안에서는 기억하고 싶은 일들도 깨달아가는 것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듯이 지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훌쩍 넘기는 달력과 함께 소중한 것들을 흘려버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제게 글을 쓴다는 것은 마냥 흐르던 삶의 한 꼭지를 붙잡아들고 제대로 마주하고 싶은 용기이기도 하고 제 마음을 돌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1년만의 답장’이라는 글도, 제가 달력 뒤로 넘겼던 하나의 기억과 함께 뭉뚱그러져있던 감정들을 1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풀어낸 결과물인 셈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자기 성찰에 그치는 글일 수도 있겠지만,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또한 이렇게 제가 한 번씩 멈추어 글을 써나가고 그 과정을 통해 성숙해져간다면, 언젠가는 자기 성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도 쓰게 되리라 믿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일기가 아닌 이렇게 공개될 수 있는 글을 쓸 때면 여러 번 퇴고를 거치며 마음이 많이 조심스럽게 됩니다. 글의 소재가 된 환자의 가족들이 글을 읽게 될 확률은 적겠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읽게 된다면 여기에 마음에 상처가 될 표현들은 없을까. 그리고 내가 쓴다는 행위에 몰입되다가 머리가 앞서나간 문장들로 내 마음을 그럴듯하게 포장해내고 있지는 않은가. 문장의 퇴고를 거치듯이 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더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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