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신문 청년의사] 성인지의학의 개념과 역사(1)

오는 8일 오후 5시 이화의대 의학관에서는 ‘한국성인지의학회’ 창립총회가 열린다. 성인지의학(Gender Specific Medicine)은 의학의 연구와 진료, 예방과 재활 등 의학의 전 분야에 걸쳐 남녀의 성차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새로운 개념의 의학분야이다.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성인지의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콜롬비아대학 의대 교수 리가토(Marianne J. Legato) 박사(심장내과)가 직접 축사를 할 예정이다. 본지는 국내에서는 아직 그 개념이 생소한 성인지의학의 개념과 역사를 살펴보는 차원에서, 이화의대 권복규 교수의 글을 세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권복규 (이화의대 교수 / 의학사·의료윤리학)

들어가는 말

1980년대 하버드 의대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는 이틀에 한 번 소량의 아스피린을 먹는 중년 의사들에게서 심장마비가 현저하게(44%)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22,071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는 그러나 피험자가 모두 남성이었다. 미 국립보건원은 1990년대에 들어서 39,876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동일한 연구를 수행하였는데, 그 결과는 이전 연구와 매우 달랐다. 여성에게서 심장마비의 위험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뇌졸중에 걸릴 위험이 약간 낮아졌을 뿐이었다.

위의 사례는 정말 의미심장하다. 아스피린은 오랫동안 소량을 장기 복용하면 관상동맥질환의 위험을 낮추어 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근거가 된 연구는 남성, 오직 남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 가능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생각되었다. 이 사실은 현대 주류 의학이 어떠한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최근 여의사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지만 의료계의 성적 정체성은 분명히 남성 중심적으로 짜여져 있고, 여의사들은 이 오래된 전문직 세계에서 예외적이거나 부차적인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남자인 의사, 그리고 여자인 간호사, 이 모델은 의료계의 아주 전형적(stereotypic)인 풍경이다.

의학, 그리고 의학뿐 아니라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대부분의 학문에서 70킬로그램의 성인 백인 남성은 오랫동안 ‘인간’의 표준형으로 간주되어 왔다. 영어의 ‘남자(man)’는 그대로 ‘인간(Man)’의 동의어였다. 해부학 교과서에서는 인간의 표준 계측치와 각 장기의 무게, 생김새를 볼 수 있고 내과학 교과서에는 혈액과 소변 등 각종 인간의 정상 검사치가 적혀 있지만, 이들은 이미 언급한 ‘70kg의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어린이, 그리고 여성은 이 성인 남성의 ‘변주(variation)’로 생각되었다. 물론 소아과학의 발전에 따라 어린이에 대한 취급은 좀 달라졌지만 여성은 생식과 관련된 소위 ‘비키니 존(bikini zone)’-유방과 자궁-을 제외한다면 남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유방, 그리고 자궁과 질을 제외한다면 여성의 몸은 남성과 마찬가지다. 이는 근대 해부학이 출발한 17세기 이후 의학의 전 영역에서 관철된 기본적인 전제였다.

성인지의학은 바로 이러한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여성은 생식기관뿐 아니라 신체의 모든 측면에서 남성과 다른 부분이 있으며 이는 의학의 이론과 실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인지의학의 주장이다. 신체뿐 아니라 여성의 정신과 마음, 행동 양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위치 또한 의학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의학이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뿐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실천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물학적 성(sex)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성(gender)을 묻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인지의학의 개념과 그 역사를 살펴보기 이전에 성과 젠더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 그리고 젠더

성(sex)은 생물체에서 표현되는 생물학적 의미의 성차이다. 생물 진화의 역사에서 약 20억년 전 성이 발견된 이후 성을 행하는(유성생식) 생물과 행하지 않는(무성생식) 생물의 차이는 크게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후손을 남기기 위한 생식 활동에서 서로의 유전물질을 교환하는 생물과 그렇지 못한 생물과는 다양성과 복잡성 면에서 차이가 생겨났고 진화는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손을 들어주었다. 성-그리고 생식-은 섭식과 더불어 대부분의 생물이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양태이며 인간도 그 예외가 아니다. 생물학적 성은 XX, XY라는 유전형(genotype),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는 외부생식기관과 체형 등 표현형(phenotype), 그리고 이것을 중개하는 내분비계 등에서 발현된다. 남성과 여성은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성적으로 확실히 구별되며, 2차 성징 이후에는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해진다.

성인지의학은 일차적으로 생물학적 성을 대상으로 한다. 의학은 주로 인간의 신체적인 측면을 다룰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녀의 신체의 구조적 차이, 각 장기와 세포기관, 약물의 대사와 기능 등의 차이가 우선적인 관심사가 된다. 예컨대 여성의 체지방 비율이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높기 때문에 지질 친화성 약물의 분포 용적은 여성에게서 더 크며, 그 결과 약물의 대사시간이 길어져 약리작용이 남성보다 더 길게 지속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전형적인 생물학적 성차에 따른 성인지의학의 적용 사례이다. 성인지의학이 여성주의(feminism)과는 무관한 ‘과학’이라는 주장은 성인지의학의 1차적 연구 대상이 남녀의 생물학적 성차라는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성인지의학의 범주를 생물학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는 협소한 관점이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의학은 ‘과학’이며, 인간 존재는 생물학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소위 ‘생물학적 환원주의(biological reductionism)’인데, 이러한 관점은 근대 서양의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이기도 하며, 의학이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질병-그리고 인간의 고통-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인 인간-환경 상호작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성인지의학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며, 그 연구와 실천의 대상을 생물학적 성에서 사회적 성(gender)로 넓히고 있다.

젠더는 생물학적인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 외연은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서서 정신적이고 행동적이며 사회적인 것을 모두 포괄한다. 남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으로 신체의 차이가 난다는 것뿐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성역할(gender role)이 매우 다름을 의미한다. 의학의 영역에서 젠더의 차이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영향은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남녀의 근본적인 생물학적 차이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그 구체적인 사례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둘째, 젠더에 대한 사회문화적 편견, 혹은 젠더에 대한 사회적 기대의 차이에 의해 생기는 문제들이 있다. 예컨대 남성보다 여성에게 적극적인 피임을 요구하는 사회의 성문화는 남성의 피임법이 대부분 더 단순하고 저렴한데도 불구하고 여성의 몸에 무리가 갈 수 있는 경구피임제 등 다양한 피임법의 사용을 촉진한다. 또 여성에게 신체활동 및 운동을 장려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여성은 청소년기에 활발한 신체활동과 운동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보다 더 자주 의료기관을 방문하지만 남성은 상태가 악화될 때까지 의료기관 방문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예들은 생물학적 요소와는 무관하게 남녀의 건강-질병현상의 차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다. 마지막으로 의학, 또는 의료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젠더에 대한 편견이 있다. 의학과 의료 역시 특정 사회의 문화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복합적인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에 남성위주의 문화 속에서 의료가 왜곡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일례로 관상동맥질환 진단을 받은 여성 환자에게 대부분의 의사들은 남성 환자들보다 공격적이고 침습적인 진단이나 치료를 잘 처방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심장병이 남성의 병이라는, 그리고 적극적인 치료가 남성에게 더 어울린다는 별로 근거 없는 믿음에 기인한 바가 크다. 여성의 관상동맥질환 증상이 초기에는 우울증이나 히스테리로 더 오진되기 쉽다는 사실 역시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일 것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이 세 가지 요소를 적용해 보자. 첫째, 여성은 같은 바이러스 부하가 걸렸을 때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이유로 남성보다 에이즈에 걸릴 확률이 세 배가 높다. 둘째, 많은 문화에서는 여성이 파트너 남성에게 예방적 목적의 콘돔 사용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있고, 일반적인 교육 수준도 여성이 남성보다 낮다. 셋째, 의료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때 그 자원은 대개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간다. 그 결과 여성은 에이즈에 훨씬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이들이 생계를 위해 매춘 등에 종사할 경우, 또 감염된 아기를 출산할 경우 등으로 인해 사회에 훨씬 더 큰 문제가 된다. 이는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에서 오늘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가슴 아픈 현상이다. 이렇듯 젠더는 생물학적 성차, 남녀의 심리적 차이, 행동적 차이, 그리고 사회가 갖는 성역할과 성차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포괄하며 각각의 차원에서 의료의 실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부 사회적 구성주의자(social constructionist)들과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 이론 그 자체도 역시 젠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학자의 연구 주제 선정, 이론 구성, 실험 모델 구축 등 연구의 모든 단계에서 성적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날 길은 없으며 젠더 중립적인 과학이란 사실상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때로 매우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 취지는 충분히 경청할만한 근거가 있다. 18세기 근대 과학이 등장한 이래로 과학-그리고 의학-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영역이었으며 남성의 세계관과 가치관, 의사소통양식을 그대로 반영해 왔고, 이 분야에 참여한 소수의 여성 과학자들도 그러한 문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론을 의학에 적용하면 오늘날의 서양 근대의학은 남성적 형이상학과 세계관에 뿌리를 둔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소산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서양 근대의학은 ‘이성’ 중심적이고 인간과 질병을 ‘대상화’하며, 질병을 ‘싸워야 할 적’으로, 환자의 몸을 전투가 수행되는 ‘전쟁터’로 간주한다. 각종 생물학적, 생화학적 정밀 도구와 더불어 인간의 몸은 하나의 기계가 되고 의사의 역할은 마치 기계공과 흡사한 것이 되어버린다. 자연친화적이고 신체와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며, 이성보다는 ‘감성’, 혹은 ‘돌봄’을 강조하는 ‘여성적 관점’은 여기서 설 자리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과 감성’, ‘인공과 자연’ 등을 ‘남성적, 여성적’으로 구분하는 인식론적 관점이 과연 타당한지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주류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서양 근대의학의 이론적 틀을 일단 수용하더라도 그 안에서 젠더의 고려는 충분히 의미 있는 산물을 생산해 낼 수 있으며, 인간에 대한 보다 섬세한 이해의 틀을 마련해 줄 수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도 왜 이제 와서 젠더가 강조되고 있는지, 왜 의학은 그동안 남성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