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현 서울시의사회 홍보이사 겸 대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올 7월경 ‘환자경험평가’를 실시할 계획이다. 평가대상기관은 상급종합병원과 일정 규모 이상 종합병원이며 추후 확대될 예정이다.

평가문항은 '환자 중심성 평가 모형' 개발연구 및 예비평가를 통해 만들어졌다. 관련 학회 및 전문가 의견수렴을 거쳐 24개 문항으로 확정됐다. 문항은 ▲영역별 환자경험 ▲전반적 평가 ▲개인특성의 3개 부문으로 구분된다. 영역별 환자경험은 ▲간호사 서비스 ▲의사 서비스 ▲투약 및 치료과정 ▲병원환경 ▲환자권리 보장으로 세분화했다. 응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로 하며 이에 따라 점수가 차등 부여된다.

새로운 평가제도의 도입은 전통적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와 소비자주의(consumerism)가 실제 의료현장에서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일 수 있다.

2004년 크루스(Cruess)는 옥스포드 사전을 인용하여 ‘전문직’이란 복잡한 지식과 술기를 습득하고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지속 발전시켜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소명이라 했다. 전문직들은 전문역량, 인격적 통합성, 도덕성, 이타심을 바탕으로 공공성을 증진시킬 책무를 이행한다. 또한 윤리강령들의 실천과 의지를 사회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전문직과 사회 사이에 사회 계약을 이룬다. 이를 담보로 전문직업의 자율성과 자율규제의 특권을 부여 받는다.

류화신에 따르면 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근대사회 형성과 함께 급속도로 높아졌다. 고도의 지식과 경험을 인정받게 된 의사는 ‘의료전문직’으로서 자율성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윤리적 기반을 갖추어 스스로에게 도덕성과 자정을 요구하는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전문가주의적 견해들은 20세기 후반부에 걸쳐 다양한 도전을 받았다. 소비자주의가 그 중 하나이다. 소비자로서의 환자 권익 향상을 위한 소비자주의적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환자는 단순히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치료과정에 공동 참여하는 수준으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고령인구 증가로 치료와 예방을 위해 지출되는 비용이 크게 증가하면서 의료비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전세계 국가들의 주요 정책 과제로 대두됐다. 영국의 NHS에서도 엄격한 심사에 근거한 예산 배정, 자금운용한도 설정, 실적지표 도입, 입찰제도, 내부 경쟁시장체계 도입 등을 골자로 한 개혁 조치가 도입됐다.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장의 힘이 강력했던 미국에서는 관리 의료(managed care)가 등장했다(박순우 2007).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단일보험자인 건강보험 강제지정제 체제하에서 국내 의료 전문직의 독점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심평원과 같은 공공기관이 환자 중심 평가를 시행한다고 하니 일선 현장의 의료인들은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운 모습이다. 전문직으로서의 의학적 견해와 환자의 요구가 배치되는 갈등 양상이 갈수록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환자경험평가'를 통해 환자의 권익을 향상시키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한편으로 소비자 보호 등 소비자주의를 강조할수록 보건의료영역에 대한 시장 개입이 더욱 강화되는 역설이 나타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1990년대 영국보건부는 소비자주의에 입각하여 환자들이 ‘고객(customer)’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환자헌장(Patient’s Charter)’을 채택했다. 환자 선택권을 확장하고, 서비스의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소비자 만족도 등을 참작해 서비스의 질을 보장하며 환자가 만족하지 않을 경우 불만을 제기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의료 영역은 소비자로서의 환자 만족도를 높이지 못했다. 오히려 소비자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의료자원의 낭비, 시장 개입, 환자 불만으로 인한 의료소송 증가 등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환자경험평가’의 시행을 앞두고, 환자에 대한 의료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한 시도들이 도리어 ‘의료의 시장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을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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