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하반기 수가 시범사업 앞두고 WPRO 교육 매뉴얼로 채택
조정진 추진위원장 "주치의제보다 단골의사의 네비게이터 체제 유도가 대안"

최근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보건복지부가 일차의료 강화를 위해 진행한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의 교육 자료가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사무처(Western Pacific Regional Office, WPRO)의 교육 매뉴얼로 채택된 것이다.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에 걸쳐 일차의료의 질 강화를 위해 서울특별시 중랑구, 강원도 원주시, 전라북도 전주시, 무주군 등의 지역사회에서 진행된 사업으로, 올 하반기부터는 건강보험 수가 시범사업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이번에 WPRO 교육 매뉴얼로 채택된 자료는 동네의원 만성질환 교육의 질적 수준 제고와 표준화를 위해 환자 교육용으로 개발된 것으로, 가정의학과·내과 교수 등 전문가 25명이 제작에 참여했다.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 추진위원장인 한림의대 가정의학과 조정진 교수를 만나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의 배경과 성과, 매뉴얼 제작 과정 및 일차의료 발전 방향에 대해 들었다.

-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을 위해 만든 교육매뉴얼이 WPRO 매뉴얼로 채택됐다. 매뉴얼에 대한 설명과 WPRO 교육 매뉴얼로 채택된 과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이전까지의 만성질환 관리교육은 개별 교육기관이나 보건의료기관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교육 자료를 활용해 왔다. 때문에 과학적 근거가 확인되지 않거나 상업적인 광고 등 환자의 건강에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내용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또 교육제공자의 지식이나 경험에 따라 교육의 질이 달라지는 등 동일한 교육이 이뤄지지 못했다.

효율적인 일차의료 서비스가 제공되려면 만성질환관리 교육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일차의료기관 의사의 역량에 상관없이 모든 환자들에게 양질의 표준화된 교육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제대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임상적 경험이 녹아들어야 한다. 그래서 일차의료 시범사업 추진위원장으로서 임상경험이 10년 이상인 교수를 중심으로 ‘건강동행 닥터원 교육매뉴얼’을 제작했다.

자찬이지만 내용이 워낙 좋다보니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가 WPRO 매뉴얼로 채택된 것이다. 매뉴얼은 고혈압 7종, 당뇨병 7종, 금연 1종 등 총 15종으로 구성돼 있으며 고혈압과 당뇨병의 진단과 관리 원칙, 건강한 생활습관의 중요성, 건강한 식습관을 위한 지침, 환자가 할 수 있는 운동 방법, 합병증예방, 금연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WPRO는 회원국의 만성질환 예방 및 관리를 위한 사업에 이 매뉴얼을 활용하기 위해 2015년 10월 복지부에 사용 승인을 요청했고 약 1년 동안의 자체 번역과 수정 작업을 통해 지난 9일 정식으로 출간됐다.

-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이 추진된 배경을 무엇인가.
심화되는 고령화 시대에서 질병 위험을 낮추고 삶의 질을 높여 의료비용을 줄이는 방법은 노년기가 아닌, 질병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치료에만 중점을 두지 말고 생애 전방에 걸쳐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금연, 음주, 운동, 식이요법 등의 생활습관 변화만으로도 질병 위험과 사망률을 절반으로 낮출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차의료 전담의가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의사-환자 관계를 바탕으로 동기부여를 통해 적극적인 생환습관 개선을 이끌어 건강위험 요인을 줄이도록 해야만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보건의료제도는 병원 의존성이 심하고 일차의료체계가 미흡한 실정이다. 예방과 일차의료 중심이라는 관점에서 이전의 정부 사업은 일차의료기관 의사의 역할이 부재하고 치료에 치우친 만성질환 관리였으며 정부 주도로 사업 기획 추진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또 지역사회 자원이 단절적으로 활용되는 문제점도 지적돼 왔다.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소하고 조금 더 효율적인 만성질환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래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에 걸친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이 진행됐다.

-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과 기존의 만성질환 관리사업과의 차별점은.
‘고혈압 당뇨병 등록관리사업’,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 ‘보건소 만성질환관리사업’, ‘건강관리서비스 시범사업’ 등이 기존의 대표적인 만성질환 관리사업이다. ‘고혈압 당뇨병 등록관리사업’은 고혈압·당뇨병 관리 센터에 등록하고, 지속적인 치료를 받는 노인환자에게 본인부담을 할인해주는 제도이고,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는 한 의원에서 지속적인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본인부담금을 할인해주는 제도다. ‘보건소 만성질환관리사업’은 환자의 자기관리 지원을 위한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업이며 ‘건강관리서비스 시범사업’은 만성질환 위험군 환자에게 자기건강관리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이 사업들은 환자 진료비 감면이라는 유인책만 활용하거나, 일차의료기관 의사의 역할이 수동적이거나 부재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작한 것이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이다. 시범사업은 의원급의 의료기관이 외래 중심으로 지역사회 자원을 연계하는 효과적인 만성질환관리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만성질환관리를 위해 일차의료 의사의 역할을 강화해 의사가 서비스 제공 여부를 판단하고, 의사 주도하에 환자에 대한 강담 및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며, 지역사회 여건에 맞도록 맞춤형 자기관리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 시범사업 모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일차의료기관 의사가 시범사업에 참여를 원하는 고혈압, 당뇨 환자 둥 사업 참여조건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환자를 직접 선별해 권고한 후 동의하면 개인별 건강생활 계획을 수립하고, 교육상감을 직접 하거나 일차의료지원센터(건강동행센터)에 교육을 의뢰하게 된다.

센터는 간호사, 영양사, 운동사 및 비상근 지역의사 센터장으로 인력이 구성돼 있으며, 의원에서 의뢰된 교육을 실시하고, 추가로 환자에게 적합한 동기강화 상담이나 지역사회 자연연계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환자 스스로가 생활습관을 개선한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하게 된다.

-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을 통해 어떤 성과가 있었나.
일차의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의료계의 문지기(Gatekeeper)와 네비게이터 (Navigator)라는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현대에서는 질병과 의료서비스 구성 변화로 기존의 문지기 역할보다 네비게이터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즉, 고령화에 따른 두 가지 변화 즉, 복잡하고(complex), 복합된(multiple comorbidity) 질환에 대한 의료수요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일차의료 영역도 통합적인 임상적 능력뿐만 아니라 조정자의 역할과 관리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건의료시스템의 저비용-저수가 및 상대수가 정책은 의료기관 종별 기능 분담을 저해하고 의원과 병원, 종합병원이 환자를 두고 경쟁하게끔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차의료 전담의사가 환자입장에서 네비게이터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의료제도 환경이 도와줘야 한다. 시범사업은 일차의료기관의 본래의 기능 중 하나인 만성질환 예방과 관리를 일차의료 전담의를 중심으로 수행하게 한 것이다.

즉 만성질환 관리 프레임을 기존의 치료 중심에서 의사 주도의 예방과 관리 중심으로 전환해 한국형 만성질환관리모형의 기반을 마련했다. 기존의 만성질환관리 프레임에서는 생활습관과 관련된 부분을 개인의 책임으로 보고 의료진의 개입을 고려하지 않았다. 시범사업은 심뇌혈관질환 선행질환인 고혈압, 당뇨병이 중증 심뇌혈관질환으로 이행되는 것을 막고자 의사를 통해 예방과 관리 교육을 제공한다. 의사의 전문성에 기반한 일대일 교육의 제공은 환자-의사관계의 신뢰도 향상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수용도를 높여 예방행동 실천 동기를 자극하는데 효과를 거뒀다.

이렇게 환자입장에서 네비게이터 역할을 의원급 일차의료전담의사가 해주기 때문에 2·3차 의료기관의 불필요한 외래 수요를 조절하고 본래의 입원환자 관리, 교육 및 연구개발 기능을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궁극적으로 일차의료의 영역과 그 역할을 규정해 국가 보건의료시스템 내 의료기관 종별 기능 재정립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 우리나라 일차의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일차의료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선 일차의료 인력양성 계획이 부재하고 동네의원 개원에 대한 진입장벽이 없어 모든 전문과목 전문의나 전공의 수련을 받지 않은 일반의까지 제한 없이 개원할 수 있다. 또 의료기관 종별 기능이 제대로 분화돼 있지 않고, 의뢰 제도의 유명무실한 기능으로 말미암아 일차의료 기능에서 무분별한 경쟁관계가 존재한다. 더군다나 실손의료보험 가입 환자의 증가로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아울러 재정정책 유인이 주로 행위서비스에 대한 상대가치로 결정돼 의료행위가 검사에 치중돼 환자에게 상담하고 설명해주고 불안을 달래면서 설득하는 진료행위를 책임져야하는 일차의료에 불리한 점이 많다.

-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일차의료 활성화를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
일각에서 주치의제가 거론되고 있지만 주치의제 도입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주치의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하지만 일차의료가 발달한 다른 나라처럼 모든 환자가 반드시 주치의 등록을 하고 주치의가 정해주는 대로 의료기관을 선택하는 방식은 전국이 일일생활권인 우리나라에서 환자와 의료진 모두가 저항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발적으로 단골의사를 정하고 네비게이터(navigator)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체계로 유도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를 위해 의사의 상담시간에 충분히 보상하는 한편 단골의사를 정하는 환자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방향이 필요하다. 상대가치수가제도 안에서 검사보다 의사-환자 관계를 중점을 둔 의사와의 상담, 진료시간에 대한 상대가치를 높이는 작업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또 의료기관 종별 기능분화와 제대로 된 의뢰제도의 강화는 필수 과제이다. 다만 여기서 고려할 점은 일차의료기관의 의사가 전통적 역할의 일차 의료 전담의만이 아닌 다양한 전문의와 수련을 받지 않은 일반의까지 섞여있는 현실에서 의료기관의 종별 구분보다는 기능별 구분에 주안점을 둬야한다.

마지막으로 질 높은 일차의료 인력양성제도의 확립도 중장기 과제로 검토돼야 한다.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환자의 질병이 매우 복합적으로 발생해 이에 대한 의료수요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단골의사를 대학병원이 아닌 동네의원 일차의료 전문의에게 맡기려면 동네에 신뢰받는 일차의료 전문의가 필요하다. 일차의료 관련 다양한 기능을 포괄하고 지속적 관리와 인격적 진료,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환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별도의 일차의료 관련 전문 교육과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환자 의사간의 신뢰적 관계를 라포(rapport)라고 하고 이는 치료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 보건의료문제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도 이 라포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불행히도 기존의 많은 의료정책들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이 라포 형성을 저해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만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해 왔다. 이 사업이 환자-의사간의 신뢰, 의사 상호간의 신뢰, 의료기관과 공적기관간의 신뢰, 의정간의 신뢰 모든 측면의 라포 회복에 기여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시범사업 적용수가가 임상효과가 있다는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무사히 건강정책심의위원회를 통과해 ‘지역사회 일차의료 건보시범사업’이 확대되는데, 모쪼록 참여하는 모든 영역이 서로 노력해 일차의료 정립에 힘을 보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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