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립의료원 파주병원 내과 이근만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설사병에 걸린 사람에게 똥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중)

환자분이 진료실에 고구마를 들고 왔다. 수줍게 내민다. 맛있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몇 년 전, 술 때문에 입원하셨던 분이다. 그 이후로 2년째 술 안 드시고 있다. 항상 선생님하고 약속 지키느라 술 안 먹고 있다고 하신다. 혼자 사는 그 환자분은, 관심 가져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약속할 상대가 없어서 그동안 술을 못 끊었을 수도.

"어르신, 고구마 감사해요. 오늘만 받을게요. 근데, 다음부터는 가져오지 마세요. 요즘은 이런 거 받으면 안 돼요."
"아이고, 먹는 거 갖고 왜 이런데요. 받으세요, 그럴까 봐 숨겨서 들어왔어요."
“네. 오늘만요. 술 계속 안 드시는 거죠?"
"그럼요, 약속했으니까."
진료실에 따뜻함이 퍼져간다. 이런 보람에 오늘도 일한다.

내가 근무하는 시골 병원에는 알코올 중독자들이 넘쳐난다. 내과 의사인 나는 술과 연관 있는 소화기 질환 환자들을 자주 만난다. 이 근방에서 술 좀 드신다는 분들은, 상당수가 나를 거쳐 가는 것 같다. 도대체 어디에서들 그렇게 마시는지 놀랍다. 간수치가 올라가거나 황달이 오고 복수가 차는 것은 다반사였다. 흔치 않은 알코올 합병증들이 넘쳐났다.

진전섬망(震顫譫妄, Delirium tremens)은 입원하고 며칠 지나서 발생하는 금단 증상이다. 몸이 떨리고, 눈빛이 흐려지고,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다. 최악의 경우는 온몸이 발작을 일으킨다. 다치지 않도록 손, 발을 침대에 묶고, 진정제로 발작을 막는다. 고통과 환각의 시간이 지나가고, 며칠 후에야 환자의 눈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환자는 ‘언제부턴가 두 개로 보인다’고 하는 게 아닌가? 머리에 종양이나, 뇌졸중이 생긴 줄 알고, 다급하게 신경과 선생님께 연락했다.
“선생님, 환자가 복시(複視, diplopia)를 호소합니다. 머릿속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닐까요?”
신경과 선생님이 환자를 보더니, “베르니케 뇌병증(Wernicke Encephalopathy)이에요. 티아민(thiamine, 비타민B의 한 종류) 주고 있죠? 더 기다려보세요. 근데, 잘 안 낫습니다…”라고 하신다. 알코올이 분해되면서 비타민B1이 소모되어 부족해서 발생하는 병. 환자는 말도 어눌해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기도 한다. 술을 끊어도 회복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한 환자는 탈북자다. 진료실에서도, 병실에서도 참 말씀이 많다.
"의사 양반. 내가 이래봬도 북에서 보위부 출신입네다. 보위부라면 뭐, 대단했지. 우리 오마이가 6.25 때 인민군으로 낙동강까지 왔었어. 그래서 내가 출신 성분이 아주 좋아. 근데, 내가 북한말로 놀새입네다. 놀새가 뭔지 아시지요?”
끝도 없다. 한동안은 흥미진진하게 들어주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이게 작화증(作話症, confabulation)이구나. 술 때문에 기억에 장애가 생기고, 빈 곳을 메우려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이후부터 가려서 듣고 있다.

술을 못 끊는 원인은 많았다.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많고, 때로는 매우 창의적이었다. 일이 힘들어서 한잔, 일이 없어서 한잔. 동료들이 맘에 안 들어서 한잔, 반대로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한잔. 날씨가 추워서, 흐려서, 비가 와서, 아니 날씨가 좋아도 한잔.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닌데도, 자기를 아껴주던 이웃 친척의 먼 누군가가 돌아가셔서 슬프다며 술에 얼큰하게 잠겨 온 환자도 있었다. 뻘건 눈으로 진료실로 온 환자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슬퍼도 한잔, 기뻐서 또 한잔, 아무튼 또 한잔. 끝이 없었다. 매 순간 술을 마실 이유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알코올 중독자들은 조용하고, 소심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술이 유일한 친구이자 해결책인 것 같았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빠진 무언가를 술로 채우려는 듯. 반대로 술을 마시는 모든 사람은 서로 친구였다. 입원해서도 어찌나 서로를 알아보고 순식간에 뭉쳐 다니는지. 선수끼리 서로 알아보는 것 같았다.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술만 갖고 이 세상을 이겨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기 한 몸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가족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주위 사람들이 하나씩 지쳐 떠나가는 듯, 거의 모두와 연락이 끊겨있었다. 경찰을 동원해야 겨우 가족의 연락처를 알아내곤 했다. 그마저도 ‘제발 연락하지 말아 달라. 법적으로 무관하다’는 대답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까지 남는 건 대부분 ‘엄마’였다. 허리 꼬부라진 팔십 할머니가 쉰 살 넘은 알코올중독 아들을 돌본다. 술에 삭아버린 아들은, 마치 남편처럼 보였다. 반백의 아들을 가리키며 “얘가 술 안 먹으면 착한데…’라 하신다.

가족들과 멀어지고, 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 남은 사람들은 가난에 허덕이거나,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곁에서 사정을 알수록, 답답하고 화가 치밀기도 했다. 어떤 알코올 중독 환자에게 보호자를 꼭 데려오라 했더니, 초등학생 남매를 데려왔다.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병동의 비좁은 보호자 침대에 엎드려 숙제하고 있었다. 먹다 남은 컵라면과 과자 봉지가 곁에 있었다. 아이들이 안쓰러워 집으로 바로 돌려보냈다.

지금보다 젊고 팔팔하던 시절에는 책상을 쾅쾅 내리치며 환자에게 소리 지른 적도 있다. “이게 맨날 무슨 꼴입니까? 가족들을 생각해 보세요!” 객기였다. 설사병 환자에게 똥을 참으라 하다니. 지금은, 후회한다. 처음에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이 처음에는 한심해 보였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안쓰러워졌고, 지금은 그게 인생이지 않은가 싶다. 나약한 정신, 마음대로 안 되는 육체. 쉽게 무너지고, 쉽게 포기하는 모습. 인간의 본래 모습이지 않을까?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 한 발 뒤로 물러나니, 더 큰 모습이 보였다. 환자에게 너무 다가서면, 답답하고, 화나고, 때로는 안타깝고 슬퍼서 숨이 막혀온다. 다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를 지를까 봐 겁이 난다.

허무함. 내과 의사의 한계가 있었다. 비정상의 여러 혈액 수치를 멀쩡하게 만들어서 환자를 퇴원시키면, 금세 다시 술 마시고, 그 혈액 수치들이 엉망이 되어 돌아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 그들의 간과 췌장은 피해자일 뿐, 정작 치료의 대상은 환자 머릿속에 있었다. 알코올에 중독되어 알코올만을 갈망하는 그들의 뇌, 전두엽. 그런데도 결코 정신과는 가려 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환자가 정신과 진료를 거부하고 ‘의지’로 끊겠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심지어 보호자들도 말한다. ‘의지’로 끊어야죠. “다리가 아픈 사람은 목발이 필요한데 의지만으로 걸을 수는 없잖아요? 알코올에 중독된 다른 이유가 있는지,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하는 게 필요합니다.” 설득도 소용이 없다.

내가 직접 정신과 의사들에게 불쑥 전화해서 도움을 구할 때도 있다.
“정훈아, 너는 알코올 환자들, 진료실에서 무슨 말 하니? 정신과 가라면 왜 이렇게 안 가는지. 어떻게 하면, 술 끊게 하는 거냐?”
“형. 저는 진료실에서 술 이야기 거의 안 해요. 취미가 있는지. 혹시 화분이나 물고기 키우는지. 아니면 달리기나 자전거 좋아하는지. 이런 이야기 해요. 자기를 바라보게 한다고 할까요? 아니면 관심을 돌리는 것이기도 하구요…."
후배 정신과 의사의 조언. 좋은 생각인 듯싶어서, 나도 진료실에서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꽃도 가꿔보고, 금붕어라도 키워보라고 했다. 효과는… 글쎄, 좀 더 기다려 봐야겠다.

퇴근길 생각이 많아졌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고구마가 아주 굵다. 가족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흐뭇하다. 따뜻한 마음에 가슴이 녹는다. 아늑하다.

한미수필문학상 시상식에 두 번째 가게 되어 영광입니다. 처음 상을 받았을 때는, ‘내가 정말 잘 썼구나!’ 하는 착각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한번 잘 쓸 수는 있지만, 계속 잘 쓰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장려상'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부족한 글 속에 숨어있는, 고민하는 의사의 마음을 읽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지원해주신 청년의사와 한미약품에도 감사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통해 배웁니다. 부끄럽지만, 이 당연한 사실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얼마 안 됩니다. 저한테 오는 환자들 한분 한분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얼마나 더 깨달아야 제대로 된 의사가 될까요? 얼마나 더 배워야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내일은 더 달라질 것이라고 다짐해 봅니다.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빠뜨리면 어떡하죠? 같이 읽고 수정하고, 같이 두근거리고 기뻐해 준 시우, 시현, 자랑 그리고 어머니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우리 병원의 모든 직원이 있었기에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이 상의 주인입니다. 여기 멀리 파주까지 파견 나오는, 강남세브란스병원의 전공의 선생님들. 당신들께 제가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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