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조사가 충분하지 않은 탓에 걸어 들어갔어야 할 것을 마차타고 간 것은 아주 잘못한 일이다. 시크협곡의 오묘한 분위기를 제대로 느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여행이 끝나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읽은 어떤 책이나 여행기에서도 마차를 언급한 분이 없었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페트라 곳곳에서 바위를 뚫어 만든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볼 수 있다. 입구가 큰 것은 주거공간이고 작은 것은 묘소일 수도 있다.(중,우는 강대출님 제공)

페트라는 오랫동안 묘원(廟院)으로 생각되어왔다. 알카즈네를 비롯하여 주변 바위마다 만들어진 크고 작은 묘실이 무려 600개를 넘기 때문이다. 많은 묘지가 발견되기는 했지만, 페트라는 묘원만은 아니었다. 전성기에는 2만5천명이 살고 있는 도시였다.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의 작은 마을에 가면 마을 가까이 묘원이 있는 것처럼 나바테아 사람들 역시 죽은 자가 쉬는 장소를 산 자들 속에 마련했을 뿐이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이 페트라를 건설하면서 적용한 건축기술은 하나의 바위덩어리로 된 사암절벽을 위에서부터 깍아 내려가는 방식이었다. 페트라에서는 당시의 건축도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미완성된 건축물을 보면 윗부분은 윤곽이 분명하나 아랫부분은 바위로 남아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건축술은 발판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건축에 들어가는 돌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건축과정에서 나오는 암석을 다듬어 다른 건축물에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원형극장은 예외였던가 보다. 페트라의 대부분의 건축물은 이곳에 분포하는 사암과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데, 원형극장에서는 대리석이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면 부근에서 높이 6m 가량의 화강암 기둥을 볼 수 있다. 요르단에는 대리석 채석장이 없으며, 페트라를 중심으로 100km 이내에는 화강암 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대리석과 화강암은 아마도 이집트에서 수입해온 것으로 추정된다.(1)

흔히 페트라를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비유하는 것은 영국의 시인 존 윌리엄스 버건의 소네트 <페트라>의 마지막 연에서 따온 것이다. 그 시를 산문으로 번역해 보았다. “오락가락하는 생각을 모아 작업하는 /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닐진저. // 바위는 영겁의 세월을 혼자서 / 묵묵히 아름답게 자라난 것일 뿐! // 그 옛날 아테나가 그녀의 신성한 의식을 행하던 / 오래된 도리아식 사원의 순백은 아니고, // 언덕에 왕관처럼 세우거나 평원에 봉헌하여 세운 / 대사원의 신전처럼 성스러운 회색도 아니고, // 처음 지켜본 새벽의 노을이 / 막 사라지기 전의 장밋빛이다. // 슬픔에 잠긴 아미 위에 드리운 젊음의 색조는 / 2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듯하다. // 동쪽의 신천지에 숨어있는 그 불가사의는 / 나에게는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 붉은 도시이다.”

페트라의 매표소에 모여 시원한 아이스크림으로 갈증을 달래고서 다음 일정인 와디럼으로 출발한 것은 5시이데, 페트라에서 와디럼까지는 왕의 대로를 따라 달리는 버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왕의대로(King's Highway)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고대 근동의 중요한 무역로였다.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서 시작하여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아카바에 이른 다음, 북쪽으로 이어져 다마스커스를 지나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레사파(REsafa)에 이르렀다. 브리태니커사전에는 2세기 초 로마제국의 트라야누스황제시절 보스트라(Bostra)와 아카바 사이의 교통과 통신을 개선하기 위하여 도로를 개조했다고 적었다.(2) 하지만 출애굽기에 유대백성을 이집트에서 끌고 나온 모세가 에돔왕에게 왕의 대로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니 적어도 그보다는 먼저 왕의대로가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철기시대에는 에돔, 모압, 암몬 그리고 아라미스 지역에 포함된 수많은 고대국가들의 무역통로였다. 나바테아사람들은 남부 아라비아 지역의 유향과 향신료를 유통시키는 대상로로 사용했다. 로마제국 시절에도 무역 및 군사도로로서 중요한 역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순례길이었다. 무슬림의 강역에 포함되었을 때는 시리아에서 메카로 가는 하지(Haji) 순례길이었다.(3)

고대 레반트 지역의 통로. 왕의대로는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서 시작하여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아카바에 이른 다음, 북으로 방향을 잡아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지나 유프라테스 상류의 레사파에 이른다 (Wikipedia에서 인용함)

왕의대로가 건설된 시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자료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성서를 기반하여 추정해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것이 치세 4년이자 출애굽 제480년이라고 기록한 열왕기를 근거로 계산한 결과, 출애굽은 BC 1448~1447년경의 일이다.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제18왕조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 혹은 아멘호테프 2세 때가 된다.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비돔과 라암셋(람세스) 성을 세웠다'라는 출애굽기 1장 11절의 기록에 따라 제19왕조의 람세스2세(재위:기원전 1279년~ 기원전 1213년) 시절이라는 설이 무게를 받고 있다. 18왕조 시절에는 람세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애굽은 기원전 13세기말의 사건이라고 보는 경향이다.(4)

일부학자들은 왕의대로가 이집트 신왕국(기원전 1570~1070년)에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대체로 이집트 중왕국의 12왕조 세누스레트 1세(기원전 1971년 ~ 기원전 1926년)가 북방 무역을 개척하기 위하여 가나안 경영에 착수하였고, 신왕국의 투트모스 1세(재위 BC 1520~ 1492)는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펼쳐 시리아를 정복하고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렀다는 기록과 당시 이집트의 국력을 고려하였을 때 이집트 중왕국 시기에 이집트가 건설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출애굽에서 왕의대로가 나온 대목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백성들은 수르광야, 마라의 샘, 오아시스 엘림, 르비딤을 거처 2년여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야훼신앙에 관한 토대를 세웠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란광야를 거쳐 신광야에 이르러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동안 야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실망한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다시 광야로 내보내 38년을 더 단련을 시키게 된다. 이러한 고행 끝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먼 길을 돌아 가나안 땅으로 가던 길에 에돔 땅에 이르게 되었다.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이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을 나가기까지 좌편이나 우편으로 치우치지 아니 하리이다.(민수기 20:17) 에돔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통과하지 못하리라. 내가 나가서 칼로 너를 맞이할까 염려하라(민수기 20:18)”라는 답을 보냈다.(5)

여기 나온 왕의대로는 에돔땅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앙도로였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왕의대로를 지날 수만 있다면 에돔땅을 멀리 돌아가는 노고를 덜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돔왕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비무장이라고는 하나 대규모 이스라엘백성이 물밀 듯이 들어온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이다. 성경에는 “20살이 넘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남자들은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모두 603,550명이었다.(민수기 1:46)”라고만 적혀있는 것을 토대로,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250만에서 600만이라고 주장하나, 60만명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6) 적게 잡아도 60만의 인파가 영토의 한복판을 누비고 지나가는 상황을 에돔왕도 용인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에돔왕이 입경을 거절하자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에돔왕국의 서쪽 변경을 따라 북상하다가 세렛강을 건너 모압의 동쪽 변경을 따라 북상하다가 아모리왕국에 이르렀다. 모세는 아모리왕국의 시혼왕에게도 에몬왕에게 제시했던 조건대로 왕의대로를 이용하게 해 달라 요청하였다. 그런데 시혼왕은 모세의 제안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백성을 치러 나왔기 때문에 전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스라엘백성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어서 바산왕국과도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왕의대로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에돔왕의 대응이 적절해 보인다.

왕의대로 주변풍경도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이다(좌), 왕의대로에도 석양이 깃든다(우)

왕의대로의 주변은 멀리 보이는 광야와 특별하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척박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광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선다. 광야에 땅거미가 내리면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바위산들이 기괴한 분위기를 만든다. 길을 따라 있는 주유소 등 상점들이 있는 나름 번화한 길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난 소로에 들어서더니 그야말로 캄캄한 공터에 차를 세운다. 무거운 짐을 끌고 휴대폰 불빛에 의지하여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갔더니 시커먼 텐트가 줄지어 서 있는 공터가 나타난다. 현지가이드가 어디든 마음에 드는 방을 이용하란다. 방은 모기장이 각각 쳐있는 두 개의 싱글 수준의 침대가 들어있는 것이 전부다. 방을 비추는 희미한 전등이 전부이고 충전용 콘센트도 없다. 예비 배터리를 총동원해야 하는 비상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씻는 것도 불편하다. 화장실과 샤워장은 있지만 더운 물은 고사하고 찬물도 펑펑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겨우 자외선 차단제를 씻어낼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용변을 보려고 변기에 앉았는데 분위기 탓인지 실패하고 이내 일어선다.

모기장을 친 침대 두 개가 겨우 들어가는 숙소(좌), 베두인 전통의 거실 모양의 야외식당(우)

겨우 어둠을 쫓아내는 전등에 의지하여 숙소에 짐을 정리해서 넣었다. 생각 같아서는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몸을 씻어야 할 터인데, 샤워장 분위기로 보아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간단하게 얼굴만 씻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은 베두인 전통방식으로 된 식당에서 먹었는데, 식당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생활양식을 야외공간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장작을 피우는 난로가 있고, 사방에 야트막한 벽을 등지고 앉을 수 있는 야트막한 좌석이 있고, 좌석 앞에는 식탁이 놓여 있다. 가운데는 비어있는 공간이다. 식사를 하러가는데 달이 휘영청 밝다. 그리고 보니 추석이 나흘 앞이다. 달빛이 휘황한 탓인지 별빛을 가린다. 노사연씨의 <달그림자>의 가사가 생각나는 것은 너무 생뚱맞을까?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 그림자 길게 드린 밤 /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 별만 헤듯 걷는 밤 / 휘황한 달빛 아래 님 뒤로 /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추석을 나흘 앞둔 달이 휘영청 밝다(좌), 강회장님 핸드폰은 역시 해상력이 좋아 오리온자리가 선명하다(우) (강대출님 제공)

참고자료:

(1) 위키백과. 페트라.

(2) Encylopaedia Britannica. King's Highway. ancient road, Middle East.

(3) Wikipedia. King’s Highway(ancient).

(4) 나무위키. 출애굽기.

(5) 크리스챤해피투어. 성지순례이야기. [요르단4편] 고대의 문화를 연결하는 왕의 대로.

(6) 뉴스앤조이 2012년 1월 3일자 기사. 김용규. “출애굽 시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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