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희 프리즘커뮤니케이션즈 자문위원

새벽녘 편두통이 거세게 찾아왔다.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과제를 준비하느라 신경을 너무 쓴 탓인 듯 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3시. 평소 먹던 편두통약통은 텅 비어 있었다. 급하게 옷을 입고 집 앞 24시간 편의점인 ‘CVS’를 찾았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도 사람들 발걸음이 꽤 많았다. CVS 대부분은 약국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일반의약품 코너를 찾았다. 질환별로 구분된 일반의약품 코너에는 브랜드별로 질서정연하게 의약품들이 진열돼 있어 소비자가 찾고자 하는 약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문의약품 조제실은 별도로 구성돼 있는데, 약사가 상주하고 낮에만 운영된다.

편두통약 진열대로 가보니 제약사별 브랜드가 다양했다. 내가 찾는 편두통 치료제는 ‘엑세드린’. 약을 구입하고 집에 돌아와 약을 복용하고 나니, 30분쯤 지나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필자가 몇 년 전 미국 유학 중에 경험한 일이다. 미국은 ‘건강이 재산’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국가다. 전세계에서 의료비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이는 국가보험체계를 제대로 갖추기 못한 채 민간의료보험에 의존해왔기 때문으로, 직장 또는 개인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질병에 걸렸을 경우 어마어마한 의료비를 지출해야만 한다. 민간의료보험의 보장질환도 가입보험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의료보험료의 지출도 보장성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 그랜드캐년에서 추락한 유학생의 의료비가 화제가 됐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아프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미국은 높은 의료비로 인해 역설적으로 일반의약품을 통한 셀프메디케이션(Self-medication)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기도 하다. 현재 약국에서 쉽게 살수 있는 일반의약품의 수는 10만여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약국에서는 다양한 질환별 일반의약품을 소비자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진열하고 있다. 같은 성분과 함량이라고 할지라도 제약사별 브랜드가 다른 경우에는 각각 진열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마트에서 다양히 진열된 치약 코너와 같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이같은 일반의약품의 경우도 제약사별 마케팅 및 영업투자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그 기저에는 이른바 소비자의 선택권을 중요시 하는 개념이 깔려 있다.

지난해 안전성이 입증된 일반의약품의 경우 편의점 확대 판매와 관련해 약계와 정부 당국간의 논쟁이 거셌다. 안전성이 충분히 확보된 의약품은 편의점에서 판매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세계 의약품 시장에서 북미 지역은 무려 40%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무려 50%에 육박했다. 미 FDA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정부기관 중의 하나로. 미국의 상품 1/4에 관여하는 기관이다. 의약품의 경우 미 FDA는 전세계의 가장 표준이 되는 의약품평가제도와 규제를 자랑한다. 미 FDA의 허가여부가 의약품의 성패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런 미 FDA가 10만여개의 일반의약품(Over the Count, OTC)의 편의점 판매를 허용했다는 의미는 많은 일반의약품이 충분히 안전성이 입증됐고, 소비자 스스로가 셀프메디케이션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2004년부터 안전상의 문제가 없는 의약품 371종의 판매를 허가했으며, 영국도 진통제, 피부연고제, 소화제 등을 자유 판매약으로 지정했다. 스웨덴, 캐나다 등도 일반의약품 판매를 허용하고 있다.

대한약사회의 일반의약품 편의점 판매 확대에 대한 반대의 주장은 빈약하다. 같은 약이라도 약국에서 팔면 안전하고 편의점에서 팔면 위험하다는 논리인데 이는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의약품의 편의점 확대판매는 소비자의 불편을 최소화한다는 측면과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막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약사회는 24시간 운영 약국을 대안으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주말에 문을 여는 약국을 찾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인데, 24시간 운영하는 약국을 찾아가기란 더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밤이나 주말에 응급실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초래한다. 최근 응급실까지 보험적용이 확대된다는 정부방침을 볼 때 향후 보험재정 상승의 주범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일반의약품 편의점 판매확대는)재정적인 측면에서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셀프메디케이션의 개념이 크지 않다. 주중에는 의료쇼핑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병의원이 도처에 있고, 그 주변으로 약국 역시 여러 곳이 자리잡고 있다. 굳이 스스로 정보를 구해 일반의약품을 구입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사를 만나는 것만으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미국과 다르게 우리나라의 국가주도 의료보험체계는 환자들에게 저비용으로 고급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해마다 먹다 남은 전문의약품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금액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2000년 의약분업 이후 일반의약품은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의 의약품 분류만 하더라도 의약분업 이후 4:6 구조에서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9:1의 기형적인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반의약품 시장은 외형적으로는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그 규모는 여전히 다른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 TV에서 사라진 일반의약품 광고로 인해 오히려 홍보광고를 강화한 한약과 건강기능식품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다시 일반의약품 관련 광고홍보가 되살아나면서 최근 다시 일반의약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매출 역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일반의약품의 선택권이 넓지 않다는데 있다.

의약품은 다른 분야와 다른 소비구조가 존재한다. 약을 복용하는 환자가 최종 소비자이지만 약의 선택권은 전문의약품의 경우 의사, 일반의약품의 경우 사실상 약사에게 있다.

병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전적으로 의사들의 처방에 자신의 건강을 맡겨야 한다. 일반의약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환자들이 자신이 명확히 찾는 브랜드가 있다면 약국에 가서 악사에게 요청해 구매할 수 있지만 브랜드를 모르는 경우 대부분은 약사의 선택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행태는 과거, 정보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일 때는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전문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전세계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지금의 시대에는 약품의 선택에 있어서도 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소비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의 경우에는 그에 대한 요구는 더 높아지고 있다.

약국의 소비자의 선택권 확대와 이를 위한 대형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약국의 입장에서도 소비자의 선택권 보장 측면에서 일반의약품을 질환별로 소비자들이 쉽게 볼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도록 진열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약국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서도 많은 숫자를 자랑하지만 소규모로 운영되고 있다. 주요 대형병원 앞에 여러 개의 약국이 난립하고 있고, 동네 약국들도 많지만 대부분이 전문의약품 조제 위주일 뿐 정작 환자들이 일반의약품 구입을 위해 약국을 찾을 때 그들에게 약품선택권은 거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약국에서는 일반의약품의 진열이 소비자 위주로 되어야 한다. 나아가 이를 위해 약국의 대형화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약국이 전문의약품 조제를 통한 매출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일반의약품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권을 늘리기 위해 규모를 확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비자는 불편하다. 미국을 비롯 유럽의 프랑스 등 대부분의 의료 선진국의 약국시스템은 일반의약품 및 의약외품 판매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약사회는 그 동안 약사의 영역 확장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모든 직능단체와 이익단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익에만 혈안에 되어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현재의 시스템이 부족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자정하고 고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안전성이 입증된 일반의약품의 편의점 판매는 이익단체의 이익이 아닌 국민의 권리 측면에서 검토되고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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