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심평통신

[청년의사 신문 양기화] 1991년에 발표된 랜다 헤인스 감독의 영화 ‘닥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잘 나가는 흉부외과 의사 맥은 “외과의의 본분은 수술이다. 남의 살을 째는데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된다. 따라서 외과의사는 환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맥이 후두암이 의심되는 증상으로 입원하면서 자신이 일하는 병원이 가진 구조적 문제에 부딪힌다. 무성의하고 무례한 접수직원,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휘장을 걷어버리는 간호사, 심지어는 다른 환자가 받기로 되어 있는 관장을 받았는데 별로 미안한 표정도 짓지 않는 담당의사 등. 의사의 입장일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띈 것이다.


▲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치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맥은 자신과 닮은 의사들을 만나게 된다.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 만난 엘리스는 뇌종양 4기로 병원 돌아가는 사정에 익숙하다. “상대를 존경하고 저도 존경받고 싶어요. 나는 죽어가고 있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엘리스의 생각을 듣고서야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맥은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신과 닮은꼴인 주치의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환자를 이해하지 못해요. 당신은 변해야 해요. 오늘은 내가 환자이지만 내일이나 30년 후에는 당신이 환자가 될 수 있고, 모든 의사가 언젠가는 환자가 될 수 있고 나처럼 충격을 받을 거요.”

2013년 미국의학회는 노인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노인 암환자의 비중이 늘고 있다고 발표했다. 2012년 기준으로 전체 암환자의 53% 그리고 암생존자의 59%가 65세 이상 노인이라는 것이다. 예방에서부터 조기진단, 치료 그리고 말기의 간병에 이르기까지 암환자 진료가 효율적으로 이뤄 질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핵심은 치료의 중심에 환자가 자리하는 것이며, 단순히 질환만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라는 인격체를 치료의 대상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미국의학회는 ‘개별환자의 선호·요구·가치관을 존중하고 빠르게 반응을 보이며, 임상적인 의사결정의 모든 과정에 환자의 가치관이 반영되도록 보장하는 의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환자중심의료를 정의하고 있다.

환자중심의료의 개념이 정립되면서 환자중심성 평가가 의료의 질평가에서 의료체계 성과의 핵심영역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영국의 경우 NHS(National Health Service)의 주도로 1972년부터 시작한 환자조사 프로그램이 있다. NHS의 입원조사의 경우 응급실 이용, 대기시간, 의사/간호사와의 의사소통, 치료과정, 수술, 퇴원 등 78개의 문항을 이용한 설문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은 HCAHPS(Hospital Consumer Assessment of Healthcare Providers and Systems)의 주도로 2002년에 환자들의 병원 입원 경험을 측정하는 설문조사 도구를 개발했고, 2006년 자발적인 첫 조사를 시행했다. 설문지는 개별경험 평가에 더해 전반적 평가 및 일반적 특성을 묻는 총 32개 문항으로 구성됐고, 조사결과는 Hospital Compare 웹사이트에 공개되며, 병원 입원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국내에서도 지역거점공공병원 운영평가, 국가고객만족도 조사 등에서 입원 및 외래를 이용한 환자들의 만족도를 조사하고 있으며, 각급 병원에서 제공하고 있는 의료서비스를 이용한 환자들의 만족도를 체계적으로 조사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에 심평원에서는 지난해 환자중심성 평가 모형을 개발하는 연구용역을 발주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연구가 종료되면 다양한 분야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평가 모형이 완성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병원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좋은 의사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 경우가 있다. 좋은 의사란 대개 진료를 잘하는 의사를 의미하는 것 같다. 하지만 환자중심성 평가가 시행된다면 이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병원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복잡한 치료과정에 참여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병원의 체계를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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