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훈정 대한일반과개원의협의회장(대한개원의협의회 기획부회장)

작금 정부는 이른바 ‘필수의료’, ‘지역의료’의 위기가 다 의사 수 부족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과학적 교육적 근거도 없이 500명, 1000명 등 숫자를 언론에 흘리더니, 작년 11월 21일에는 ‘의대 정원 확대 수요조사’라는 미명 하에 각 의대에서 최대 3900여명의 증원을 원한다는 황당무계한 발표를 해 의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를 막론하고 인기 영합적 공약이 난무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국정을 책임진 정부에서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보건의료공약을 이렇게 간보고 치고 빠지기 식으로 터뜨릴 수 있는지 황당하기 그지없다.

좌훈정 대한일반과개원의협의회장
좌훈정 대한일반과개원의협의회장

의료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필수의료, 지역의료의 붕괴 현상은 의사 숫자 부족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배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이

유를 밝혀왔다. 그 이면에는 역시 원가 이하의 저수가로 첫 단추를 잘못 꿴 건강보험제도는 물론이고 정부나 사법당국이 방치의 단계를 넘어 사실상 방조하고 있는 의료진에 대한 폭력이나 의료분쟁 시 과도한 배상금,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의사에 대한 무거운 형사처벌 등을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매년 전공의 모집에서 소위 필수의료 과들에 대한 전공의 지원율이 급감하여 필수의료 붕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될 더욱 심각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이미 배출된 전문의들조차도 자기 전공을 포기하면서 다른 길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공의 지원율 감소보다 더욱 빠르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예상보다 필수의료 붕괴를 더욱 앞당길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엔 개원의뿐만 아니라 대학병원 교수들까지 합세하고 있어서, 몇몇 대학병원들조차 필요한 전문의를 구하지 못해 진료를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 입장에선 힘들게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하고 더 힘들게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거기서 4~5년의 고된 수련 기간을 거쳐 전문의가 됐는데 설마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이미 수년 전부터 악화되고 있으며 여러 통계에 의해서도 증명이 된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밑바닥에 큰 구멍이 나서 침몰하고 있는 필수의료라는 배에서 살기 위해 탈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배는 수리하지 않고 사람만 더 태우면 무슨 소용인가.

갈수록 심해지는 전문의의 전문 진료 포기

필자가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한일반과개원의협의회에는 약 1만 명의 회원이 소속돼 있다. 명칭에서 시사하듯 전문의 수련과정을 수료하지 않은 일반의는 물론이고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고도 일반과 의원으로 개원한 의사들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전문의로서 일반의원으로 개업하는 분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07년 건강보험통계를 보면 전체 의원 수 2만6,000여 곳 중에서 일반과 표시 의원이 7,000여 곳이었고, 그 중 일반의가 2,600여 명, 전문의로서 일반의원으로 개업한 경우가 4,500여 명이었다. 그리고 2020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의원 수 3만3,000여 곳 중에서 일반과 표시 의원이 9,000여 곳으로 늘었다. 그 중 일반의가 약 3,000명, 전문의로서 일반의원으로 개업한 경우가 약 6,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즉 지난 13년 동안 일반과 표시 의원 중 일반의가 400명 정도 늘어난 반면 전문의는 1,500명이나 늘어났다는 것이다(3년이 흐른 지금 더 늘어나고 있다).

이는 전문의가 자기만의 전문적 진료를 포기하고 다른 과의 진료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의미다. 물론 자기 전문과 진료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미용성형이나 통증 등 원래 전공과는 크게 다른 형태의 진료과목 위주로 개원한 의사들이 더 많다.

일반과의사회는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더 심각하게 체감하고 있다. 4~5년이라는 긴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들여 애써 취득한 전문의 자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다른 과 진료를 한다면 국가적인 보건의료자원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일반과의사회 소속의 전문의 회원들께 항상 듣고 있다. 그 건 지금 필수의료 붕괴의 이유와 다르지 않다. 원가 이하의 저수가로 인한 경영난과 의료진에 대한 무방비 폭력, 의료 분쟁 시 과도한 배상액 및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높은 형사 처벌율 등이다.

결국 이런 열악한 의료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수많은 전문의들, 특히 필수의료의 전문의들이 자기 전공을 포기하고 일반의원으로 개원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일은 의대를 졸업하고 갓 의사면허를 취득한 신규 의사들이 이런 대열에 합류하는 수효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 많은 선배들조차도 이런 현실에 좌절해 전공을 버리고 일반의원으로 개원하고 있는데,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전공 수련을 위해 4~5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외침이다. 심지어 우리 의료현실을 납득하지 못하고 미국이나 일본 의사시험을 준비하는 젊은 의사들도 늘어나고 있다.

정부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아니라 전공 포기를 두려워해야 한다

작년 10월 15일 개최됐던 대한개원의협의회 학술대회의 기자간담회에서도 필자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었다, 과거엔 의대 졸업 후 전문의 수련을 받지 않고 바로 미용성형 등으로 개원 현장에 뛰어들겠다는 후배들이 있으면 일단은 어떤 과든 수련을 받으라고 권했었지만, 지금은 참담한 의료현실 때문에 그러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여러 선배들의 자조적인 표현처럼 ‘장롱 전문의 자격증’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데, 젊은 의사들에게 4~5년의 세월을 들여 힘든 수련을 받고 나오면 자기 전공을 잘 살려서 소신껏 일할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더라도 그 인원이 이른바 ‘필수의료’ 또는 ‘지역의료’로 가지 않을 것이며, 그 수효만큼 우리 의사회로 오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우리 의사회도 반길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일반과로 개원한 의사들이 의학적 원칙에 충실하게 소신껏 진료하면서도 병의원 경영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며, 나아가 전문의들이 자기 전공을 다시 살려서 개원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일부 어용학자들이나 언론이 주장하는 소위 ‘낙수효과’, 즉 의대 정원을 늘리면 필수의료나 지역의료에 종사하려는 의사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허구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이미 지금도 힘들게 수련했던 자기 전공을 포기하는 의사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데, 의대생 숫자만 늘린다고 의사들이 경영난이나 수억대 의료소송으로 파산하거나 아차 하는 순간 형사 처벌되는 길로 굳이 가려 할 것인가.

결국 작금의 일반과 개원 러시는 지난 수십 년 간 쌓여왔던 대한민국 의료의 열악한 환경에 의사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는 뚜렷한 증거이며, 여기에 대한 의사들의 소극적이지만 처절한 저항의 결과이다. 의사들이 정치결사나 노조처럼 극단적인 저항을 할 수는 없지만, 대신 전공의 지원을 하지 않거나 수년 동안 힘들게 배웠던 전공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맞서는 것이다. 이는 법률적이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기에 비난하거나 강제로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동안 의료계가 숱하게 지적했듯이 필수의료나 지역의료의 위기는 대한민국 정부와 사회가 합당한 재원을 투자하고 또 사법적인 리스크를 줄여줌으로써 부득불 자기 전공을 포기했던 전문의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번에 의대 정원을 얼마나 늘리든 필수의료나 지역의료에 뛰어들 의사는 증가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지금 종사하고 있는 의사들의 이탈이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우리는 해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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