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수호 전 대한의사협회장

“주 회장님 말씀이 맞아요. 이 법이 통과되면 억울한 의사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수 국민을 위한다면 의사가 억울해도 입법하는 게 그게 사회 정의 아닌가요?”

십수 년 전 필자가 대한의사협회장으로 재직 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통과를 목전에 둔 의료분쟁 관련 법이 있었다. 환자나 보호자 측이 의료사고라고 주장하면 의사와 의료기관 측이 의사와 병원 측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입증 책임 전환’ 관련 내용이 담긴 이 법을 발의한 의원에게 부당함을 지적하자 돌아온 답이었다.

주수호 전 대한의사협회장
주수호 전 대한의사협회장

더 오래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소비자모임 대표에게 “동네의원과 지방 병원에서도 충분히 진료가 가능한 환자들까지 모두 서울 유명 대학병원으로 몰리면 대학병원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중증 고난도 환자의 진료 차질을 초래해 결국 의료소비자인 국민에게 피해가 간다.”

“의협과 귀 단체가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한 캠페인을 함께하여 수도권 대형병원 환자 집중을 막아 국민 피해를 줄여보자”고 제안했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가 명색이 소비자단체인데 소비자의 병원 선택권을 제한하자는 캠페인을 하는 건 말도 안 됩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각국의 국민 건강 상태를 객관적 수치로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 두 가지는 출생 후 평균 몇 년을 살 수 있는지로 정의되는 기대수명과 신생아 1,000명 중 1년 이내 사망하는 영아가 몇 명인지로 정의되는 영아 사망률이 있다.

2022년 OECD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83.5년으로 OECD 평균 80.5년보다 3년이 길며 특히 여자의 기대수명은 86.5년으로 일본에 이어 2위이다. 영아 사망률 역시 OECD 평균인 4.1명에 비해 현저히 낮은 2.5명으로 세계 최정상급이다.

즉 대한민국의 건강지표는 전 세계 최정상급임이 객관적으로 확인된다는 거다.

이러한 객관적인 건강지표가 세계 최정상급을 유지하는 데에는 국민 보건위생 및 영양상태가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것이 가장 큰 이유겠으나 의료 접근성이 세계 최고라는 것도 중요하다.

대한민국 의료 접근성이 세계 최고라는 건 국민 1인당 연간 외래 진료 횟수 OECD 평균이 5.9회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14.7회로 세계 최다일 뿐만 아니라 국민 1인당 입원일수도 세계 최장이라는 것으로 입증된다.

객관적 자료에 의한 전 세계 최고 수준의 건강 상태와 전 세계 최고 의료 접근성을 갖춘 나라의 의사 수가 부족하니 의대 입학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이 OECD 국가들 사이에서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궁금하다.

인천 가천의대 부속 길병원의 소아과 병동 폐쇄로 알려지기 시작한 소아청소년과를 비롯한 소위 필수진료과의 몰락이 연일 화제다.

현재 일부 학자와 정부가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의대 입학 정원 확대와 필수 의료 분야 수가 인상과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의사들의 책임 완화 같은 각론으로는 필수 의료는 물론이고 의료 자체의 몰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우리나라에 절대 의사 수가 부족한지에 대한 논란은 일단 접어 두자.

의사라는 전문직에 대한 폄훼를 넘어 돈만 좇는 부도덕한 집단이라는 비난이 만연된 사회 분위기가 변하여 의사의 사회적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하는 대우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기 전에 대한민국 의료의 소생은 요원하다.

지난 수십 년간 전공의 지원율 100%였던 소아청소년과 지원이 급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던 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과 사태 때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받은 의료진에게 일벌백계라는 단어를 동원해 마녀사냥 했던 소위 환자단체 대표라는 자가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 대해 의료진의 책임을 완화하자는 안에 대해 여전히 반대하며 정부의 보건 의료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위원회에 참여하는 한 대한민국 의료 소생은 요원하다.

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우대하는 사회는 후진사회다. 동시에 전문가의 가치가 폄훼되고 능멸당하는 사회는 결코 선진사회가 될 수 없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영유아 사망률이 급감하는 등 인류의 건강지표가 크게 좋아진 중요한 요인은 바이러스 질병에 대한 방어막인 예방주사, 박테리아 감염에 의한 사망을 획기적으로 낮춘 항생제의 개발 및 외과적 수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뒷받침한 마취학 등 현대의학의 발전이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발전보다 과학의 발전에 따른 상하수도 시설 보급 등 생활환경 개선과 먹을거리가 풍족해진 까닭에 전반적인 보건 영양상태가 호전된 것이 기대수명과 영아 사망률로 대표되는 국민 건강 상태의 획기적인 개선에 이바지한 바가 더 크다는 게 정설이다.

몰락하는 대한민국 의료를 소생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사를 불신하고 의료를 폄훼하다 못해 능멸하는 사회 풍조를 전문가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선진사회문화 조성이다.

전반적인 주거환경 위생 상태와 개개인의 영양상태가 개선된 전제하에 현대의학의 발전이 획기적인 국민 건강 증진을 가져왔듯이 전문가의 가치를 정당하게 대우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되면 적정수가와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면책은 자연스럽게 따라서 온다.

언론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대한민국의 의료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는 것이 대한민국 의료를 살리는 첫걸음이다.

일부 돈만 좇는 부도덕한 의사들에 대한 강력한 의료계 내부 자정 운동과 의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대 교육과정이 지금보다 강화돼야 함은 필수 의료 몰락과는 별도로 당연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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