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수 전 대한의사협회 총무이사(미래의료포럼 발기인)

인구 대비 병상수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를 기록한다. 아주 자랑스러운 국가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OECD 보건통계(Health Statistics) 2020'를 보면 한국 병상수는 인구 1,000명당 12.7개로 OECD 평균인 4.3개의 3배에 달한다. 정부는 돈을 거의 안들이고 민간자본으로만 세계 최고를 기록한, 자랑스럽다 못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아주 희한한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미래의료포럼 발기인 안양수
미래의료포럼 발기인 안양수

OECD 통계를 보면 한국만큼 의료접근성이 좋은 나라는 없다. 병상수도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지만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횟수도 연간 14.7회다. 이것 역시 OECD 평균의 2배가 넘는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전국민이 의사에게 진료 받고 입원하는데 거의 장애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의사가 부족한 나라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수치들이다.

한국은 전국민 건강보험을 실시하면서 본인부담금을 메꿔주는 실손보험까지 도입해서 거의 무상의료체제를 갖추었다. 통계를 보면 아예 비용 문턱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처럼 보인다. 환자 입장에서는 동네의원, 동네병원에서 진료받으나 대형병원에서 진료받으나 비용 부담이 거의 없으니 가급적 큰 병원을 찾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보인다. 2021년 기준 상급종합병원의 병상당 입원 내원일수는 342.8일이었다. 상급종합병원의 거의 모든 병상이 1년내내 환자로 넘쳐나 빈 병상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너도나도 큰 병원으로만 몰려드니 의사당 외래환자 수도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이고 병상당 입원일수도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규모만 키우면 환자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너도나도 수도권에 분원을 세우는 것이 유행이 됐다. 현재 9개 대학병원이 11개 분원을 추진하면서 오는 2028년까지 최소 6,600병상이 수도권에 더 생긴다고 한다. 한마디로 병상이 노다지를 캐는 금맥이 된 것이다.

외래환자는 더 많이 몰려오고 입원환자가 넘쳐나서 1년내내 빈 병상 찾기가 어려우니 의사도 더 늘리고 병상도 더 빨리 늘려야 할 판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딱 상급병원에만 해당된다. 눈을 돌려 의료시스템의 하부구조를 보면 참담하다 못해 아주 처참하다.

한국 의료전달체계는 제일 하부에 의원, 그 다음에 병원, 그리고 그 위에 종합병원, 그리고 최상단에 상급종합병원으로 분류해 놓았다. 상급종합병원은 시스템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런 식으로 단계별 시스템을 구축하고 하부 조직부터 환자들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운용한다. 그게 비용효과면에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전달체계에 별 관심이 없다. 거기다 실손보험까지 들어와 그나마 있던 비용문턱까지 제거해버렸다. 그러자 상급종합병원이 최상위 포식자로 변한 것이다.

하부구조 두번째 단계에 속하는 병원의 2021년 병상당 입원내원일수는 180.8일이었다. 1년내내 전체 병상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는 뜻이다. 병원 병상수가 47만3,265병상인데 그중 23만8,871병상이 1년내내 빈 병상으로 있었다. 더구나 통계를 보면 빈 병상의 수가 해마다 늘고 있다. 죽을 쑤고 있는 것이다.

병원보다 더 하부구조인 의원의 병상을 보면 한국에 부족한 것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의원의 병상수는 2006년 10만0,727병상으로 정점을 찍고 지속적으로 감소하면서 2021년 5만4,255병상으로 반 토막이 났다. 그마저도 1년에 250일 이상이 빈병상이다.

시스템의 하부구조가 무너지고 있는 징후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타났다.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의원들이 전문과 간판을 떼기 시작했던 것이 20년 정도 된다. 이들이 전문과를 떼고 미용성형으로 넘어갈 때 눈길이나 준 사람들이 있는가. 눈만 뜨면 하루가 다르게 병상은 늘어나는데 1년내내 빈 병상만 지키는 병원은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시스템의 하부구조에 있는 의사들을 소모품 취급하면서 때만 되면 공공성을 찾는 것은 낯간지럽지도 않은가.

하부조직이 무너지면 신규면허자들이 구태여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쳐 전문의를 취득할 이유가 확연히 줄어든다. 전문의 따고 대형병원에 남지 못했을 때 갈 곳이 없으면 수련과정 자체가 도박이 되는 것이다. 하부조직이 무너져 어차피 미용성형으로 넘어갈 거면 전공과정 없이 그냥 바로 넘어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의료법에는 ‘보건복지부 장관은 병상의 합리적인 공급과 배치에 관한 기본시책을 5년마다 수립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의무조항이다. 그런데 난 이때까지 단 한번도 복지부 장관이 병상수급정책을 발표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국회의원들은 뭐하나. 법안만 만들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장관이 뭉개고 있어도 한번도 지적하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사회에 부족한 것은 의사가 아니다. 환자 수에 비해 의사의 증가폭이 너무 빠르고 더더구나 병상 증가폭은 거의 폭주 기관차 수준이다. 압도적 세계 1위도 부족해 이제 다른 나라들이 아예 넘보지도 못하게 차원을 넘어서려고 한다.

문턱이 제거된 시스템에서 환자들은 너도나도 앞다퉈 위로만 몰려가고 시스템의 하부는 누구도 들여보지 않고 있다. 다같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이다. 실손보험 덕에 폭발하지 않았을 뿐이다.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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