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수 미래의료포럼 발기인(전 의협 총무이사)

일반적으로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를 메이저과라고 한다. 의료의 가장 핵심이 되는 과들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핵심과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지 20년도 넘었다. 내 기억에 가장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곳은 외과였다. 외과가 제일 먼저 무너지기 시작했고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가 그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 전체 외과의원 수는 지난 2004년부터 완만하게 줄고 있고 의원 1곳당 외래환자 수는 그보다 더 가파르게 줄고 있다. 의료기관(의원)과 환자 수가 함께 주는 전형적인 불황의 곡선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불황의 기간동안 외과 전문의 2,329명이 새로 배출돼 전체 외과 전문의는 6,361명이 됐다. 산부인과와 소청과도 시기와 모양이 조금씩 다를 뿐 비슷한 불황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래프 1] 외과의원 수와 의원 1곳당 외래환자 수 변화
[그래프 1] 외과의원 수와 의원 1곳당 외래환자 수 변화

여기서 짚어볼 것이 있다. 거의 20년전부터 메이저 3과가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왜 큰 이슈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전혀 이슈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0여년전 시골 지역에 분만병원이 없어지면서 주목을 끌었고 최근엔 소청과 사태가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환자 진료에 차질이 생길 때만 사회가 주목을 한다. 환자 진료에 차질이 없으면 의사들이 망하든 말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쉬울 땐 찾고 아쉽지 않을 땐 알빠노(내 알바 아니다)한다. 의사를 소모품처럼 여기는 것이다.

의사를 사회 구성원으로 여긴다면 구조적 문제로 파트 별 잉여자원이 생겼을 때 사회가 같이 머리를 맞대고 출구전략도 고민해줘야 한다. 고민한다고 해서 완벽한 해결책이 나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회가 같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스스로 사회 일원임을 자각한다. 그런데 철저하게 외면하다가 환자 진료에 차질이 생기면 그때야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해결책이라며 의사 증원을 들고 나온다. 만약 기업이라면 여기저기 일이 없어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직원들이 넘치는데 어느 한 부서에 구멍이 생겼다고 그걸 메꾸기 위해서 신입직원을 뽑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의료시스템 하부조직에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의사들이 나날이 넘쳐나는데 정부, 정치인, 정책학자, 시민 사회, 모두가 그들을 마치 투명인간 취급한다. 그리고 대형병원만 제대로 돌아가면 아무 문제없다는 식이다.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의사들이 있으니까 의사를 대신한다는 PA, 전문간호사에 대해서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하는 것인데 그걸 이기주의라고 비난한다. 내가 볼 때 정말 이기적인 것은 의사가 아니라 바로 이 사회다.

20년전부터 외과가 무너졌는데 그 기간 외과의사는 왜 2,000명 넘게 배출됐을까. 이 사회가 필요해서 외과의사 2,000명을 배출했는가. 좀 솔직해지자. 이 사회가 필요했던 것은 외과전문의가 아니라 싼 값에 부리며 대형병원을 유지시켜줄 외과 전공의가 아니었나. 값싼 전공의가 필요해서 수천명의 전문의를 양산해 소모품처럼 버리는데 정말 이기적인 것은 의사가 아니라 바로 이 사회라는 생각은 안 드는가.

2021년 기준 의원급에 근무하는 외과의사는 2,560명이다. 그런데 외과의원 수는 1,018곳이다. 적어도 1,000명 이상의 외과전문의가 전문과 떼고 일반의원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다. 산부인과는 전문의 3,156명에 산부인과의원 1,313곳이고 소청과는 전문의 3,183명에 소청과의원 2,111곳이다. 메이저 3과에서만 수천명의 전문의가 전문과 간판 떼는데도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의사를 대체한다는 PA를 들이고 전문간호사를 들이는데 가만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사정이 좀 낫다는 메이저 최후의 보루, 내과도 의원급에 전문의 7,530명이 있지만 정작 내과의원 수는 5,088곳에 불과하다. 의원 1곳당 의사 수 1.37명을 감안해도 1,000명에 가까운 내과 전문의가 전문과 간판을 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원 1곳당 외래환자수 추세를 보면 내과도 2009년 정점을 찍고 감소 중이다. 최후의 보루 내과에 허락된 시간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프 1] 내과의원 수와 의원 1곳당 외래환자 수 변화
[그래프 1] 내과의원 수와 의원 1곳당 외래환자 수 변화

복지부가 발표한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2022년)을 보면 한국의 의사증가율은 OECD국가 중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의사의 연평균 증가율이 OECD 평균은 1.4%지만 한국은 그 3배에 가까운 3.4%로 2000년 이후 단 한번도 1위를 내주지 않았다. 의사 수 증가속도는 너무 빠르고 그에 비례해 시스템 하부에는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의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입만 열면 의사 부족이라는 헛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버려지는 의사들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하며 대형병원만 들여다본다.

사회가 의사를 구성원의 일원으로 동등하게 대하지 않고 자기들 필요한 것만 뽑아 쓰며 나머지 의사들은 망해서 간판을 떼든 말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데 왜 의사들은 정부 정책에 무조건 협조해야 하는가. 수가는 정부가 꽉 틀어쥐고 환자 부족에 견디지 못하고 전문과 간판 떼고 일반의원으로 넘어가 비급여, 미용성형으로 입에 풀칠하는데 그것조차도 비난한다. 어떻게 든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비난 받을 일인가.

그 힘든 수련과정 견뎌내고 십 수년 전문의로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전문과 간판 뗀 전문의들이 넘쳐나는데, 왜 의사를 대체한다는 PA와 전문간호사에 찬성해야 하는가. 갈수록 환자수가 줄어드는 명확한 증거를 보여줘도 개원의들 망하든 말든 내 알바 아니고 대형병원 돌리기 위해서 의사 수를 늘리겠다는 이 사회에 왜 의사들이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안양수 전 의협 총무이사
안양수 전 의협 총무이사

십여년의 세월을 바쳐 취득한 전문의로 살 수 있게, 제발 의료전달체계를 제대로 만들어 달라고 그렇게 외쳤건만 ‘알빠노’ 하지 않았나. 그렇게 비급여, 미용성형으로 내몰렸는데 이제 그것조차도 숨통을 끊어 놓겠다고 비급여 통제까지 들어오면 아예 생존도 하지 말고 퇴출하라는 말인가. 이 사회는 수천 수만명의 장롱면허가 양산되어도 대형병원만 무너지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말하는데 왜 의사들이 저항하면 안되는가.

조금 더 벌어보겠다는 게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의 문제이고, 선택할 자유에 관한 문제이다. 일회용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려면 족쇄를 풀어달라. 어차피 버리는 카드인데 뭐가 그렇게 두려워 꽁꽁 묶어 놓고 있는가. 나에게 생존할 권리를 달라. 나에게 선택할 자유를 달라. 나는 ‘건강보험 강제 지정제’ 결사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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