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의대 정원 확대 합의' 논란에 내홍
찬성 선회 어렵고 반대해도 대응 쉽지 않아
젊은 의사 분위기도 변화 "해봤자 무소용"
의과대학 정원 문제로 의료계가 진퇴양난에 빠졌다.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정부에 당장 동조하기는 어렵다. 반대 입장을 고수하더라도 뾰족한 대응 방법이 없다.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정부 의지는 확고하다. 2025학년도라는 구체적인 시기까지 언급하며 추진하고 있다. 의사가 부족하고 필수의료 확충을 위해 증원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료계 내에서는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여론이 강하다. 대한의사협회가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미룬 논의를 시작한 것만으로도 비난이 일 정도다.
의협은 지난 8일 제10차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의사 인력 재배치와 확충 방안 논의를 위한 '필수조건'에 합의했다고 밝혔지만 '의대 정원 확대' 자체에 합의했다고 알려지면서 집행부에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의협 집행부가 대의원회 수임사항을 위반했다며 탄핵(불신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논란이 지속되자 서울시의사회는 지난 12일 성명을 내고 의협 집행부에 의사결정 과정 공개를 요구했다. 지난 9일 열린 전국시도의사회장협의회 회의 결과에 따른 조치다.
서울시의사회 박명하 회장은 지난 13일 청년의사와 통화에서 "의료현안협의체를 시작하면서 이필수 회장이 의대 정원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와 의협 간에 관련 합의가 나와 시도의사회 우려가 상당하다"고 했다.
박 회장은 이번 합의가 의협 내부 논의 없이 성사된 점도 지적했다. 시도의사회 대표로 서울시의사회가 집행부에 "의사결정 과정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다.
박 회장은 "(이번 합의) 이전에 의협 차원에서 진행한 의대 정원 논의는 (의료계 반대에도) 정부가 정원을 확대했을 때 대응 방안이 초점이었다. 이마저도 구체적인 수준은 아니었다"며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정부와 합의하고자 하는 내용을 최소한 대의원회와 시도의사회 회장단에 사전에 공유하고 의견을 수렴했어야 한다"고 했다.
박 회장은 "(지난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선제적 접근이 결정된 비대면 진료와 달리 의대 정원 문제는 긍정적인 검토가 가능한 의제가 아니다. 일단 의협이 정원 확대 합의를 부정했으므로 당장 급진적인 논의로 나가지는 않으리라 예상한다"며 "지금으로서는 집행부의 다음 행보가 중요하다. 회원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의대 정원 확대 반대는 의협 대의원회 수임사항이기도 하다. 만약 "정부의 지속적인 압박" 등으로 의협이 입장을 변경하려면 임시대의원총회를 개최해 논의와 의결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한다.
의협 대의원회 박성민 의장은 청년의사와 통화에서 "의대 정원 관련 합의는 대의원회 수임사항을 변경해야지만 가능하다. 임총 개최나 대의원회 서면 결의를 거치지 않고 의료현안협의체에서 결정 사안이 나오면 대의원을 비롯해 회원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라고 했다.
다만 임총을 개최한다고 해서 의대 정원 확대 찬성으로 선회하거나 새로운 합의점을 마련하리란 보장은 없다.
진짜 문제는 "의협이 반대해도 정부가 결정하면 끝"이라는 점이다.
박 의장은 "의협이 반대해도 정부가 단독으로 결정하면 정원은 확대된다. 정부 의지에 달린 문제"라면서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정원이 확대될 거라는 예상도 나온다. 대의원회도 대응 방안을 두고 고민이 많다"고 했다.
지난 2022년 의료계 단체행동처럼 전면 투쟁이나 대규모 파업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낮다. 당시 단체행동을 주도한 젊은 의사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4월과 5월 연달아 개최한 임시대의원총회에 의대 정원과 공공의대 설립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지만 이후 구체적인 의사결정이나 대응 방안을 내지 않았다.
대전협은 지난 12일 입장문에서 "의사 증원은 정부가 추구하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문제 해결법이 될 수 없다"고 했지만 필수의료 분야 재정 지원 확대와 건강보험제도 개선에 무게를 실었다. 의대 정원 확대가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했지만 "반대한다"는 직접적인 문구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의료계 관계자는 "대전협 강민구 회장이 의료현안협의체에 참석하는 만큼 대전협 차원에서 이전처럼 강경하게 나오기 어려운 입장일 것"이라면서 "처음부터 '장외'에 있는 것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는 것은 차이가 크다"고 했다.
"이러다 다 망한다"…그러나 나설 "힘도 없다"는 전공의들
'장외' 민심도 전과 다르다.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정부가 말하는 증원 효과에도 회의적이다. 그러나 전공의들은 3년 전처럼 의견을 "행동으로 이어갈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말한다.
전남 지역에서 근무하는 전공의 A씨는 "전공의들이 반대해도 정부는 정원을 확대할 것이고 의협은 거기 끌려갈 것"이라면서 "간호법과 의료법 개정안(면허취소법) 대응에서 다시 한번 확인됐다"고 했다.
A씨는 "설령 전공의가 나와도 개원가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다"며 "최근 의협 행보도 그렇고 의대 정원 증원을 저지하겠다는 선배 의사들의 의지가 굳건한지 의문이다. 언제까지 '전공의들 왜 안 나오느냐'고 할 생각인가"라고 반문했다.
마찬가지로 지난 2020년 단체행동에 참여했던 서울 지역 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B씨는 "사실상 2020년이 마지막 기회였다"고 단언했다.
B씨는 "그때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의료계가 끌어낼 수 있는 힘이란 힘은 모두 소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비슷한 규모는 물론 행동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충청 지역 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C씨 역시 "'해도 안 된다'는 게 전공의 사회에 깊이 각인됐다"고 했다. 단체행동을 거치며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 노출된 젊은 의사들이 "위축되고 행동하겠다는 의지가 약화됐다"고 했다.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확대를 비롯해 정부 정책을 우려하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서울 소재 대학병원 외과 전공의 D씨는 "나만 망하면 모르겠는데 지금 대한민국 의료가 다 망하게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밥그릇'으로 퉁치고 안 들어주는데 무슨 소용이겠느냐"며 "정부도 일반 국민 인식하고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우리(의사)가 손에 쥐고 있는 게(해결법) 없다"고 했다.
구심점 잃은 의대생들 "우리 문제 맞나…기대 없다"
전공의와 나란히 단체행동 선봉에 섰던 의대생 사회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은 2021년 제18대 회장단 임기 종료 후 2년 넘게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모 의대 학생 대표 E씨는 "구심점을 잃기도 했고 그사이 의료계 현안에 대한 학내 관심도 자체가 떨어졌다. 의대 정원 문제도 그 중 하나"라면서 "우선 의협이나 의료계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다만 우리 의대생들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의대에서 학생 대표를 지낸 F씨는 "우리가 나서서 바꿀 수 있을 때 '우리 문제'이지 우리가 무엇을 해도 아무 변화가 없는데 '우리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F씨는 "의대 정원 확대 추진도 그렇고 정부가 내놓는 대책이 대책 같지가 않다"며 "아예 다 무너트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의도라면 성공적이라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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